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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미 Nov 11. 2019

29년만의 가출

나는 오늘 드디어 가출을 한다. 29년 만이다. 22살 때에 집을 나가 절에서 1년을 살았다. 그리고 그때의 경험은 내 인생 전반에 거쳐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오늘 나는 남편에게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다.

“나 일주일 동안 혼자 여행 좀 다녀올게.”
“미쳤구나.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서 그래?!”

그래. 나는 모른다. 아니 안다고 해도 무섭지 않다. 사람 사는 곳이 다 거기서 거기지 무섭긴 뭐가 무섭다고 그러냐고 맞받아쳤고 남편은 갈 거면 호적에서 파버리겠다고 되받아쳤다. 그러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고 큰소리 쳤지만 나를 호적에서 파버릴 수 없을 거라는 똥배짱도 한 몫 했다.

아침에 가방에다 옷을 챙기며 생각했다. 뭘 챙겨야 하지? 면티 두 개, 청바지 두 벌 챙겨놓고 멍하게 앉아 커피를 마신다. 갈 곳은 정했고 버스는 예약해뒀고… 또 뭘 해야 하는 걸까. 집도 나가본 놈이 또 나간다고 했다. 뭐 암튼 옷은 대충 챙겨놓고 이번엔 책을 챙긴다. 집 나가 읽을 책 두 권을 가방에다 챙겨놓고 나니 든든하다. 근데 책 볼 시간이 있을까. 비상약처럼 쓰든 안 쓰든 챙겨가 보는 거지 뭐,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식탁 위에 뭔가 못 보던 게 놓여있다. 남편이 언제 챙겨두었는지 비상약과 연고, 반창고 등등을 넣은 비닐백을 얹어 둔 게 보인다. 다행히 호적에서 파버릴 생각은 접었나보다. 어차피 보내줄 거 곱게 보내주면 좋잖아. 마누라 이겨 먹는 남편치고 잘 되는 꼴을 못 봤다는 속담도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우산을 챙기고 현관에서 운동화를 신고 발을 탕탕 굴리며 씩씩하게 집을 나선다. 투두둑 비가 온다. 배낭 하나에 보조가방 하나 울러 메고 버스를 타러간다. 그렇게 나는 떠났다.

동서울터미널에서 출발해서 3시간 30분. 나는 지리산으로 떠나왔다. 그리고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코를 벌름거리며 공기를 흠뻑 들이켰다.

“아, 숨 쉬고 싶게 만드는 냄새.”

사람들이 혼자 여행을 떠나기까지 제일 오래 걸리는 시간은 바로 집 밖에 첫 발을 내딛기 까지 걸리는 시간이다. 그냥 나와서 버스를 잡아타고 떠나면 된다. 그런데 그걸 못 해서 못 떠나고 산다. 집 밖은 위험하고 세상은 더 위험하고 여자 혼자 떠나는 것은 더더 위험하다는 생각과 만류 때문에 쉽게 떠나지 못한다. 특히 운전도 못하는 나 같은 뚜벅이족은 더더욱이나 그렇다.

숙소에 들어와 창밖으로 보이는 지리산을 본다. 짐을 벗어놓고 숙소 밖으로 나와 혼자 밥을 먹으러 갔다. 순두부 백반. 혼밥이다. 게 눈 감추듯 한 그릇을 뚝딱 비운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밥은 역시 남이 해준 밥이다. 식당을 나와 동네 마실에 나선다. 온통 산이고 개울이고 나무고 산새 우는 소리고 매미 우는 소리다. 밤하늘에는 하나 둘 별이 떠오르고 달과 별을 더욱 빛내주기 위해 어둠이 깔린다. 다시 숙소로 들어와 가방에서 책을 꺼내 눕는다. 창밖으로 풀벌레들이 자기 이름을 부르며 울고 있고 나는 조용히 책을 펴서 읽는다. 익숙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불편한 것은 아니다.

세상은 생각보다 서정적이다. 여행을 떠나보면 안다. 일상에 지쳐 더 이상 나에게 어떤 것도 감흥을 주지 못할 때 내 몸에 감성이라는 수분이 바싹 말라 버렸을 때 그때는 생각 없이 내 울타리를 벗어나보길 바란다. 그래봐야 별 일 안 생긴다. 집 안에 내가 해야 될 일들은 여전히 쌓여있고 공과금을 내야 될 날짜를 지나쳐 연체금을 조금 더 내야 될 수도 있다. 도서관에 책을 반납할 기한을 넘길 수도 있지만 그렇다 해도 그게 뭐 그리 대단할까. 그것쯤으로 내 인생이 흔들릴 만큼 위태로워지는 것도 아니다.

“똡빠로 올라가요. 여피로 새지 말고."


둘째 날. 지리산 둘레길 3코스를 걷다가 만난 아저씨가 한 말이다. 똑바로 올라가요. 옆으로 새지 말고. 여행은 이렇듯 알지 못했던 친절한 사람들을 만나게 해준다. 사람이 아니어도 좋다. 뱀사골에서 만난 뱀은 걸음아 날 살려라 수풀로 내빼고 논에서 만난 허수아비는 나쁜남자 포스로 나에게 눈길 한번 안 준다. 우리 할머니 닮은 할머니도 만났다. 무거운 열무단을 들고 버스에서 내리시길래 집까지 들어드렸더니 사이다 캔 하나를 내 손에 꼭 쥐어주신다.

산 속까지 쩌렁쩌렁 울리게 방송이 나온다. 폭염주의보가 우짜고 외출을 자제 저짜고….
땀이 비오듯 흐른다. 둘레길에 아무도 없다. 나하고 길만 있다.

길가 호두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열매에 검버섯이 하나 둘 늘어나면 쪼글쪼글 늙어버린 뽀얀 속살의 호두가 열매를 가르고 나오겠지. 붕붕 열심히 꿀을 모으는 벌들의 분주함과 어디선가 꼬끼오 꺼끼오~~ 워월 컹컹컹~~ 모든 소리가 정답고 모든 풍경이 따뜻하다.


한참을 걷다보니 병충해 때문에 반은 곪아버린 고추를 따는 할머니의 굽은 등이 보인다. 올 해 지리산 고추농사는 다들 망했다고 어떤 아저씨가 귀띔해 주었다. 둘레길 쉼터에서 만난 분인데 얼음 동동 띄운 오미자 주스를 내주시며 쉬었다 가라 붙잡으신다. 고마운 마음에 엉덩이를 평상에 걸치고 앉아 아저씨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대우조선에서 명퇴 당하고 이곳에 내려와 살게 되기까지의 히스토리를 네버엔딩 스토리로 듣는다. 밥 한 술 뜨고 가라며 포도도 따 주시고 돼지고기도 삶아 결국 숟가락을 손에다 쥐어주신다. 이 아저씨 정말 사람 정이 그리웠구나.

“인생 뭐 있어?”

라고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해 줄 생각이다.

“인생 뭐 없지. 어제처럼 산다면.”

나 혼자 불쑥 떠난다 해도 별 일 안 생긴다. 아니 별 일이 좀 있으면 어떠랴. 때로는 걱정을 내려놓고 될 대로 돼버리도록 떠나보길 바란다. 그리고 나서 이야기해 보는 거다.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그 이전과 이후 중에 언제가 더 행복한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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