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화폭 삼아 꿈을 그려본다

3부 세상을 그리다.

by 상욱애비

첫 강의



농원의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여기저기서 귀농에 대한 강의 요청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가 그럴 자격이 되나 고민했고 거절했지만, 아내는 기왕에 공동체를 만들기로 했으니 해 보라고 한다. 작은 술자리에서나 편견을 토로했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공동체를 이야기했었지만, 강의 형식으로 대중을 대상으로 해서 내 주장을 펼쳐 보긴 처음이었다. 그리고 강의 원고를 작성하면서 생각만 해오던 꿈을 정리하게 되고 글로 써보게 되었다.



첫 강의의 기억은 뜬금없는 전화로 시작되었다.


S 총무, 그는 전직 기자였으며 ‘자연을 닮은 사람들’의 J 대표와 같이 일하는 사람이라고 간단히 자기소개하고는 나에게 다짜고짜 귀농을 꿈꾸거나 귀농한 사람들의 모임에서 강의를 해 달라고 요청을 하는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당황하고 망설이자 그는 이 전화는 미얀마에서 하는 거니 통화는 오래 하기 그렇고 메일 주소를 알려주시면 자세한 취지와 행사내용을 보내겠다고 했다. (그는 그 당시 미얀마와 한국을 오가며 선교 활동을 하고 있었다. 몇 년 뒤 그는 완전히 미얀마로 이주했다. 그의 느닷없는 뜬금없음은 그 뒤로도 몇 번 나를 당황하게 했다. 미얀마에서 그는 자기가 돌보는 다운증후군 아이의 교육에 대해 몇 번의 조언을 구했고 난 먼 거리에 구체적인 정보도 없이 간단한 조언만 하는 안타까움을 가진 적이 있었다. 최근 미얀마에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고, 민주화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는 소식에 그가 문득 떠 올랐다. SNS 계정을 확인해 봤지만 내가 연락할 방법은 없었다. 마음속으로 무사하기만 바랄 뿐이었다.)



그가 보낸 이메일에서 그는 자기를 모 종교 농민회 총무라고 소개했다. 그 농민회는 교회의 교인들이 모인 귀농 단체였다. 그리고 ‘자닮’의 J 대표에게 내 이야기를 들었고 나의 귀농 이야기와 유기농 직거래 방식이 독특하다고 생각돼 강의를 요청한다고 했다. 2박 3일 하는 총회 모임에는 전 농림부 장관의 강의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인 말이 내가 주장하는 자립형 복지 공동체인 ‘캠프아라리’를 알리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자립형 복지 공동체에 도움이 된다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뭐든지 마다하지 못하고 하던 시기였었다. 나는 또 우선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는 2달여 남은 기간 원고를 작성하며, 강의 연습을 매일 혼자서 했다. 원고를 쓰며 고민하는 나에게 아내가 말한다.


“강의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우리 이야기를 편하게 해. 우리가 누굴 가르칠 자격이 되나? 우리는 이렇게 잘못 선택하며 살아왔습니다. 당신들은 이렇게 살지 마세요. 하는 거야."


마지막으로 강의 전날 서울에 올라가 대학교수인 친구 녀석을 불러내 노래방에 가서 리허설을 했다. 그 친구 녀석은 내 강의 원고를 보더니 ‘이 정도 내용이면 한 달용이다. 이걸 한 시간에 어떻게 다 하냐? 줄여라.’ 한다. 밤새 원고를 수정하며 날밤을 꼬박 새웠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하며 한 강의는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다.


병석에 누운 아내에게 약속했던 ‘상욱이나라’, 그 ‘상욱이나라’를 막연하게 꿈꾸며 시작했던 농원, 그리고 귀농 후 알게 된 무서운 음모 같은 사실들. 나만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의 문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러니한 건 우리가 모두 가해자고 피해자라는 사실이었다.



참고 : 강의 동영상 https://blog.naver.com/wkdusguard/208908654



(이 글을 쓰고 발행을 하려던 즈음에 S의 SNS 댓글이 달렸다. 아직 미얀마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단다. 종교를 떠나 위험지역에서 타인을 위해 봉사 활동하는 그의 모습에서 신에 대한 희망을 느낀다. 모쪼록 무사하기를…. 그가 믿는 신께 기도해 본다.)




세상을 화폭 삼아


공동체의 꿈을 그려보기 시작한 것은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였다. 귀농 후에도 가끔 만나는 친구들이 몇 있었다. 그들과의 술자리는 과거와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나에게 과거를 연결하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또 그들과 술을 하는 이유는 과거와 연을 이어가는 사람 중에서 나의 꿈을 응원하는 친구들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가끔 하는 그들과의 술자리는 당연히 내 꿈 이야기가 화두가 되었다.



그들도 처음에는 내게 마음에 여유를 가지 편안하게 살라고들 했다. 아이가 내가 우려하는 삶을 살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다. 내가 아이의 미래를 걱정하는 게 기우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야 그랬으면 좋겠다. 그런 행운이 내 아이에게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내가 우려하는 삶을 살면서 죽지도 못하고 고통스럽게 살면 어떻게 하냐? 그래서 이러는 거야. 지금 내가 하려고 하는 것은 내가 알고 있는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고 그걸 대비하려고 하는 거지. 굳이 내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삶은 고민할 필요가 없어. 아이가 행복하게 살면 좋지. 그렇게 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할 뿐이야.”


법을 생업으로 하는 친구가 술이 오른 얼굴로 한마디 거든다.


“네가 걱정하는 게 기우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긴 해. 그런 나쁜 놈들이 살긴 하거든. 그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어, 순진하고 뭘 모른다고 이용하고 학대하는 사람들이 나쁜 놈들이지. 참 이상한 문화야, 가해자는 인권이 있는데 피해자는 그런 것도 없어. 정작은 가해자들을 이 사회로부터 격리해야 하는데 죄 없는 피해자들을 격리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건 정말 모순이긴 해. 이 이야긴 또 가해자가 피해자보다 많다는 이야기도 되나? 참 인간의 탈을 쓴 사람이 많다는 거지.”


그 이야기를 듣고 또 다른 친구가 술잔을 돌린다.


“비판보다는 해결책을 찾아야지. 격리의 명분이 보호잖아, 그럼 격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보호하는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되겠네. 주변 네트워크, 동료, 동료네. 우리 모두 처음이 두려운 이유는 전부가 낯설기 때문이잖아. 그런데 가족이 있고, 든든한 동료가 있거나 친구가 있다면 두려울 이유가 없어. 동료가 있는 게 공동체의 가장 큰 장점이잖아. 동료를 만들어 주는 거야. 너와 비슷한 Need를 가진 사람들을 모아봐. 아마 많이 있을 거야.”




사업을 하던 친구는 바쁜 약속이 있다며 세상을 바꾸려 하지 말고, 네 아이 문제나 해결하라고 충고하듯 말하고 일어났다. 그 친구는 현실성 없는 이야기만 하지 말고 우선 앞가림이나 하라는 의미다. 그런데 이 문제를 내 아이만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이건 사회가 문젠데…. 그 친구가 가고 나서 그 이야기를 씹을수록 화가 났다. 정말 맥락 없는 이야기다.


“세상이 문젠데 세상을 바꾸지 않고 아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나! 각자가 자신의 문제만 해결하려고 해서 지금까지 해결 못 하는 게 아닌가.”


내 눈치를 보던 한 친구가 툭 내뱉는다. 나는 한숨이 나왔다. 간 친구의 한마디가 사회의 공고한 편견의 벽을 다시 한번 되새김시켜준다.


“이건 내 아이의 장애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설정에 관한 문젠데….”


“그래, 일종의 마녀사냥이지, 정치적으로 만들어진…. 바벨탑 같은 우생학과 전쟁의 광기에 가득한 히틀러 나치의 국민 단합용 거짓 선동으로 태동된, 그걸 바탕으로 일어난….”


갑자기 술이 쓰다는 느낌이 든다. 비록 세상을 바꿀 수는 없을지 몰라도 나마저 그들의 공범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내 아이가 너무 불쌍해진다. 방관과 침묵도 범죄에 대한 묵인이고 동의일 수가 있다.

조용히 술잔만 기울이던 언론사에 근무했던 친구가 시를 읊조리듯 말을 이어간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에게 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사회민주당을 봉쇄했을 때도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사회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들이 이번에는 노조로 눈길을 돌렸다. 나는 또 방관했다. 나는 노조도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다음으로 유대인에게 갔을 때도 나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유대인도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그들이 내게 왔을 때 나를 위해 나서 줄 이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친구는 손에 든 소주잔을 털어 넣으며 잔을 건넨다.


“공동체의 붕괴란 이런 게 아닌가 싶다. 히틀러의 나치 인종주의를 반대하던 마르틴 니묄러(Martin Niemöller)라는 독일의 신학자가 있었어. 그가 지은 ‘그들이 내게 왔을 때’라는 신데 여기 핵심이 있는 거 같아. 개인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우리는 공동체의 근본을 놓치고 있는 거 아닐까? 난 언젠가 나한테 이런 문제가 생기면 황당할 거 같아. 내 주변에 아무도 없다면…. 별 힘은 없지만 난 네 옆에 있을 거야.”




술들이 적당히 들어간 후라 모두에게 나의 감정이 이입되어 한 마디씩 거든다.


“큰 캠프를 치는 거야. 그 안에서 비도 피하고, 바람도 피하는 거지. 세상 사람의 편견과 폭력도 피할 수 있는 그런 캠프를 만드는 거야. 네 농원을 모델로 시작해 보는 거지. 생각해봐 너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꽤 있지 않을까? 그런 사람들이 모이는 거지. 그래서 작은 마을을 이룬다면, 아니 이 농원에 와서 산다면 그래서 이 농원이 마을의 중심 수입원이 되면서 마을의 랜드마크가 되고 마을이 농원이 되는 거지. 그러면서 이 마을은 스페인의 ‘마리날레다’ 마을처럼 자치 공동체의 길을 걷는 거야. 쉽진 않겠지만 모델이 있는데 한국형으로 벤치마킹하면 되지 않을까?”


“야, 한번 해봐! 그게 뭐라고 못할 건 없잖아. 너 벤처기업 했었잖아. 벤처기업 만들 듯이 시작해 보는 거야. 모든 역사는 시도해야 시작되는 거야. 처음부터 길은 없어. 누군가 걷기 시작하면서 길이 나는 거지. 첫 발자국, 두 번째 발자국이 나면서 길이 되기 시작하는 거야.”


“홍길동 율도국을 건설하러 떠나듯 너도 서울을 떠났잖아. 우린 너만큼 절실하지 않아서 여길 떠나지는 못하지만 진짜 너의 용기가 부러워. 응원할게”


“그거 좋네, 정선이 아라리의 고장이라며, ‘캠프아라리’라고 이름 지어. 이름 좋잖아.”


“야, 너 대학 때 서양화가 전공이었대며, 잘 한번 그려봐. 네 꿈을 그려보는 거야. 세상을 화폭 삼아 네 꿈을 그려보는 거야. 야 그 그림 어마어마하다. 하하”




그렇게 세상 그리기가 시작됐다. 만약에 이런 친구들이 나와 같은 꿈을 꾼다면? 그래서 의기투합해서 작은 마을을 이룬다면, 아니 이 마을에 와서 산다면 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공동체에 대한 꿈을 구체적으로 스케치해 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