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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욱애비 Nov 04. 2020

하느님 정도의 빽은 돼야!

개집 때문이었다. 원래 풀밭에 자리했던 개집이었는데 집주 견(犬)인 마루가 집 주변의 풀을 다 파버렸다. 시뻘건 진흙이 비만 오면 질퍽거렸다. 진즉에 옮겨 주려고 장소를 봐 두었는데 개집이 너무 무거워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개집을 지을 때 하얀 풍산개가 자꾸 진흙이 묻는 게 싫어 먼저 낮고 튼튼한 평상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위에 나무로 개집을 공작하듯이 만들었다. 하나씩 따져도 무게가 꽤 나갔는데 두 개를 고정해 놓으니 장정 세 사람이 들어야 겨우 움직일 정도였다. 이 개집을 30m 정도 옮기는 데 사람을 쓰기도 그래서 숙제처럼 미루고 있었다.     



아침 뉴스 일기예보에서 장마가 곧 시작된단다. 더는 미룰 수 없다.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개집을 옮겨야 한다. 그래서 어떻게든 혼자 옮겨 보려고 며칠을 궁리했다. 억지로 생각해 낸 방법이라는 게 지렛대 방식을 이용해 차 뒤에 걸쳐서 실어보는 것이었다. 차(트럭)의 뒤 짐칸에 개집의 한쪽 귀퉁이를 걸쳐 놓고 이쪽저쪽 돌아가며 조금씩 올려 보았고 거의 다 올라는 갔다. 그냥 조심해서 가도 될 만했는데 이동하는 길이 경사가 있어 이동 중에 떨어질까 봐 신경이 자꾸 쓰였다. 조금만 더 올려보자 생각했고, 차 뒤에서 개집을 온몸으로 밀어 올렸다. 개집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나는 두 발을 지지대로 아틀라스가 지구를 떠받들 때의 자세로 용을 썼다. 그때였다.     



허리에서부터 쾅 소리가 머릿속으로 천둥소리처럼 크게 울렸다. 다리에 힘이 풀리며 종이 인형처럼 주저앉았다. 아 큰일 났다. 본능적으로 허리에 문제가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에 예초기로 풀을 깎다가 땅벌에 쏘여 119구급차에 실려 간 적이 있었다. 그때의 경험이 있는 아내가 또 119에 전화를 했다. 119에서는 자기들이 도착할 때까지 그 자리에 꼼짝도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가랑비가 조금씩 내렸다. 아이가 와서 우산으로 얼굴을 가려준다. 눈이 따가워지며 눈물인지 빗물인지 얼굴이 젖어간다. 정신이 자꾸 가물거린다. 이제 그만하자. 마음 한구석에 눌러 놓았던 작은 유혹이 스멀거리며 올라온다. 그만해도 돼. 할 만큼 했어. 이제 내려놓고 좀 쉬자.     



3번 요추 압박골절이었다. 3개월을 입원했고 그 후유증으로 몇 번의 사설 119를 타고 정선과 분당을 오갔다. 6개월 동안 거동을 못 하는 환자로 보냈고 약 1년을 재활했다. 걸어야 산다는 기치를 세우고 걸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생각도 생각할 여유도 없이 살아야 한다는 본능에 충실했다. 정선의 아리 바우길을 걷다가 추우면 강릉의 바우길을 걸었다. 한 번씩 서울의 병원을 갈 때면 서울의 둘레길을 걷는 등 어디든 가면 무조건 걸었다. ‘이제, 그만하고 너를 생각하면서 살아. 너는 현실을 너무 몰라. 그게 너 혼자서 할 일이냐?’ 오랫동안 안타깝게 지켜만 보던 친구가 참지 못하고 한마디 툭 던진다. ‘네가 애쓰면 너만 힘든 거 같아? 네 가족도 너만큼은 힘들 거다.’ 그런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게 아니다. 매번 친하다는 놈들은 다 했던 소리고 이제 그 소리에 익숙해졌건만 이번에는 가슴에 울림을 준다. ‘그래 알았다. 이만하기를 천만다행으로 알고 이제 조심하고 살게.’     



막연히 도시를 떠나야 살 것 같았던 절박함이 귀농의 계기였다. 귀농 후 농촌의 상대적 박탈과 억울함이 보였다. 농업에 관한 제도와 농산물 유통의 문제가 대다수 영세농민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왜곡시키고 있었다. 열악한 수입구조로 삶의 질이 좋지 않았고 그로 인해 아름답던 시골인심도 옛말이 되어버렸다. 내가 귀농 전 생각하던 농촌과 완전히 달랐다. 이 차이를 줄여보고 싶었다. 그래서 직거래 농원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공동체를 공부하게 되었고 세상의 불평등함이 자꾸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왜 함께 사는 공동체에서 나만 아니면 될까? 왜 사람들은 작은 편함을 위해 큰 불의에 눈 감을까? 인간의 삶이 동물과 다른 점이 무엇일까? 이 모든 의문의 근본에는 내 아들이 있었다. 자유경쟁의 논리에 세뇌되어 있던 나는 ‘쓸모없는 놈들’이라는 말을 달고 살았었다. 그러다 아들을 만나고 평등에 대한 조건과 인권의 소중함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장애 탓만 했었다. 재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막연하게 돈을 벌려고 했다. 돈이 나의 불편함을 덜어 줄 수는 있지만, 아이의 삶의 질을 보장해 줄 수 있을까? 내가 아이를 보호해 줄 수 없을 때 아이는 어떤 삶을 살아갈까?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장애인들이 사는 공동체를 찾아보았다. 유럽의 ‘캠프힐’이라는 공동체를 알게 되었을 때 눈이 번쩍 띄었고 그게 답인 줄 알았다. 누군가 우리나라 복지시설은 동물원에 비유하면서 ‘캠프힐’은 사파리에 비유했다. 그래도 그게 어디냐며 꿈을 품었다. ‘캠프힐’ 같은 공동체를 한국형으로 만들어보려고 ‘캠프아라리’라고 공동체 이름도 지었다. 유럽식 ‘캠프힐’ 공동체는 우리나라 사회문화로는 불가능했다. 영국이나 독일의 ‘캠프힐’처럼 생활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지원과 후원금 그리고 무엇보다 꾸준한 자원봉사자가 필수였다. 그런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립형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수입원인 농원에 더욱 집중했다. 먼저 농원의 수익구조를 탄탄하게 만들고 2~3 가족의 동참자를 만든다. 1차 목표였다. 그리고 고객의 범위를 확산시켜 우리 마을을 ‘캠프아라리’화한다. 이것이 2차 목표였다. 우리 마을을 모델로 전국으로 ‘캠프아라리’ 마을의 확산이 3차 목표였다.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고 진행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이가 들어감에 조급함이 생기기도 했지만 1차 목표에서 2차 목표의 진입까지는 어느 정도 가능하리라 생각했었다.      



성급했는지 이제 조금 더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할 때다 싶을 때 일이 터진 것이다. 3 재(三災)를 믿지는 않지만 그런 일에 부닥쳤다. 벌에 쏘여 기절했고 119에 실려 갔다. 그다음 해에 회전근개 파열로 수술을 했고, 그때부터 농원을 휴경했다. 그리고 다시 농사를 시작한 때 허리가 부러진 것이다. (내가 병원에서 골절이요? 하고 물어봤을 때 의사는 네, 골절이 부러진 거예요. 친절을 가장한 표정으로 짧게 말했다). 3년, 딱 3년 동안 일어난 일이었다. 이 일로 지금까지 4년을 쉬게 된 것이다.     



벌에 쏘여 죽다가 살아났을 때 나에게 일어날 시험은 끝이거니 했었는데 다시 이런 일이 생기니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젊을 때 겪는 역경은 젊음을 자극했고 열정을 불태우게 했지만, 지금 겪는 고난은 살아온 삶의 과정을 후회하게 했다. 내가 옳다고 믿어왔던 삶의 흔적들을 의심하고 타협하지 못한 결정들을 후회했다. 맞는다고 생각하고 독불장군처럼 가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싶은 생각이 나를 초라하게 했다.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내 아이로 인해 깨달았지만, 지금은 내 아이에게만 국한되어 생각하면 안 되는데 자꾸 아이가 눈에 밟혔다.     



옳은 목적을 세웠으면 방법도 옳아야 한다. 사업을 하면서 많이 봐 왔지만,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지는 못한다. 편법은 더 큰 편법을 낳게 되고 한 번의 거짓은 삶을 타락시키는 시작이 된다. 정선 와서 일이 어려움에 봉착하거나 더디게 진행될 때마다 생각한 나름의 삶의 철학이다. 기초가 튼튼해야 집이 빈듯하듯이 시작이 발라야 끝도 바를 확률이 높다. 이제 나를 다시 점검하고 내 능력에 맞게 방법을 수정해야 한다. 내가 생전에 할 수 있는 일로 목표 설정을 현실적으로 해야 한다. 십 년 뒤에 내 아이의 삶의 질을 구상해야 한다.     



밥상머리에서 물끄러미 보고 있던 아내가 갑자기 이야기를 꺼낸다.     

‘태초에 창조주인 신이 인간을 처음 만들 때 선한 마음만 활성화해서 만들었대. 그랬더니 너무 순해서 야수들에게 자꾸 잡아 먹혀 멸종 위기에 처해진 거야. 큰일 났다 싶어 신이 궁리 끝에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욕심의 봉인을 풀어줬어. 신은 인간을 만들 때 동물과 다르게 이성을 만들었어. 그 이성의 핵심이 사랑과 배려인데 이게 양심의 본질이지. 그런데 너무 이런 마음만 있으면 발전이 더딜 것 같아 마지막으로 만든 게 욕심이었대. 그런데 테스트를 해보니 욕심은 제어가 안 되는 거야. 게다가 다른 자율 장치들에 욕심이 붙어 변형까지 시키는 거야. 그래서 신은 욕심을 봉인해 놨었어.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니까 봉인을 해제할 수밖에 없었지. 그때부터 문제가 복잡해지기 시작했어. 인간은 멸종을 면했을 뿐만 아니라, 생태계의 최고 포식자가 되고 지금의 문명까지 이루게 된 거야. 그런데 다른 종을 지배하자 이제는 인간끼리 서로 지배하기 위해 물고 뜯으며 싸우기 시작했어. 이게 그 욕심의 부작용이었지. 이대로 가다가는 인간만이 아니라 전부가 멸망하겠는 거야.’     


‘그거 말 된다. 결국, 신이 인간을 포기해서 세상이 이렇게 된 거구나.’     


‘아니, 지금부터가 중요한 거야. 신이 천사들에게 세상을 바로 잡아라는 명령을 내렸대. 천사들은 지금의 인간은 이미 욕심의 노예가 되어 구제 불능이라 판단하고 싹 물갈이하는 전략을 썼어. 바벨탑, 노아의 방주, 빙하기 등 지금까지 지구를 위험하게 했던 일들이 모두 지구를 리셋시키려는 천사들의 작품이었대. 그런데 지금 어떻게 됐어? 결국, 천사들이 실패한 거야. 그래서 신이 화가 났어. 자기가 인간에게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자정 능력을 줬는데 그걸 활용하지 못했다고 천사들을 꾸짖었어. 한구석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천사가 신에게 말했어. ‘저희에게 기회를 다시 한번 주소서. 저희의 모든 능력을 빼앗고 불완전한 모습으로 인간 세상으로 보내주소서. 우리의 힘으로 인간의 양심을 다시 깨워보겠습니다. 욕심을 바른 방향으로 인도해 보겠습니다.’ 그래서 그 천사들이 우리 아이들로 태어난 거지. 세상은 우리가 바꿔야 하는 거야. 우리 아이들이 우리의 동기 부여고.‘     


아내의 이야기가 나를 겨냥하는 듯했다. 나는 아내의 눈길을 피하며 맞장구를 쳤다.     


’아, 그래서 우리 아이들을 천사라고 부르는구나. 재미있네. 동기부여가 팍팍되는데.‘     


’ 물론이지, 그리고 무엇보다 세상 아이들이 전부 장애가 아니잖아. 우리 아이가 장애인 이유는 우리가 선택받은 거라는 거지. 아무나 세상을 바꾸나? 게다가 당신은 남들보다 고난도 많이 겪었잖아. 경험도 많고 또 생각이 바르잖아. 그러니까 당신은 쉽게 죽지도 못해. 신이 준 미션을 끝내고 죽어야 해. 안 그럼 죽어서도 후회할 거야.‘     


아내의 눈이 촉촉해진다.     


‘여보 있잖아, 예전에 내가 벌에 쏘였을 때 정말 죽는 줄 알았어. 살려고 무릎을 꼬집고 눈에 힘을 주면서 자꾸 희미해져 가는 의식을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어. 그런데 왜 그렇게 살려고 했을까? 고통도 없고 아무 생각이 들지도 않았는데. 보험을 들어 놓지 않아서 그랬나? 하하 만약에 자살을 생각한다면 벌집을 건드려 벌에 쏘여 죽는 것도 괜찮을 것 같더라고.’     



아내가 눈을 흘겼다.     


‘허리 다쳤을 때는 다른 거 보다 정말 억울했어. 혹시 내가 깨닫지 못한 어떤 큰 잘못을 저지른 건가? 아니면 아직 내가 겪어야 할 고난이 남았나? 그런데 지금 역으로 생각해보면 아직 고난이 남았다는 것은 아직 삶의 미션이 끝나지 않았다는 말이잖아? 아직 시험이 남았다는 것은 나에게 해야 할 일이 많다는 증좌라는 생각도 들더라고. 당신 말대로 상욱이가 나에게 왔다는 것은 내가 특별히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거겠지. 하느님이 나를 선택했다는 거고, 아직 그 임무가 끝나지 않은 거지. 아마 지금이 새벽의 짙은 어둠일 거야. 해가 뜨기 전이 제일 어둡다잖아.’     


아내가 웃는다. ‘당신은 너무 긍정적이야. 과할 정도로’ 안심했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한다. 아내의 그런 얼굴을 보며 이제 대 놓고 허세를 부려본다.      


‘인생의 마지막을 후회하면서 사는 것보다는, 열정을 불태우며 보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서야. 그리고 창조주이신 하느님 정도의 빽이 되어야 내가 다시 힘을 내 볼만하지 않겠어?‘      



              

20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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