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아이

by 상욱애비


몇 년 전 ‘자립형 공동체 캠프아라리’ 임시 추진위원회가 송년회 겸 정선에서 열렸다. 다들 현역에서 일하기에 교통편이 복잡해도 주말에 모여 기본 방향을 잡기로 하고 모인 세 번째 모임이다. 블로그를 보고 모인 순수한 ‘캠프아라리’ 동지인 그들은 모두 사회복지를 전공한 사람들이었다. K 교수와 수원의 K 관장, 그리고 사회적 기업을 하는 G 사장 외 2인, 나 포함 6인의 원탁회의였다.


큰 그림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의견이 모이고 실현 가능성 타진과 방향 설정, 초기 공동체를 시작할 때 어느 수준의 장애를 기준으로 시작하느냐로 갑론을박할 때였다. K 교수가 상욱이를 기준으로 생각하지 말자고 한다. 상욱이는 정말 특별하다고 하면서 말이다. 다른 참석자 모두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리 여기 오기 전 서울에서 아이가 몸이 많이 아파서 아무것도 하지 못할 줄 알았다고 이야기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한편으론 불쾌하기도, 우습기도 했다. 이들은 장애 아이를 ‘관리하기 쉬운 정도’로 평가하는 것 같았다. 이들이 특별히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겠지만 그런 게 이미 사회의 통념 속에 박혀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특별해봤자 혼자서 뭘 할 수 있으며, 혼자서 할 수 있더라도 이미 사회가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있지 못하지 않느냐는 말에 다들 입을 다문다.




남들은 내 아이가 특별하다고 한다. 비록 다운 증후군이라는 선천성 염색체 이상으로 생긴 장애를 갖고 태어났지만 똑똑하다고 말한다. 사회성도 좋고, 자기 의사 표현도 제법 잘하고, 자기 억제능력(참을성)도 있고 일반인과 어울려 살기에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인다고들 한다. 우리 부모들이 모이는 카페에 아이 이야기를 올려놓으면 아이의 자라는 모습이 너무 기뻐 눈물이 난다는 젊은 어머니들, 상욱이를 롤모델로 아이를 열심히 키우겠다는 어머니들의 댓글이 달린다. 그런데 다들 특별하다고 하는 내 아이는 과연 뭐가 특별하다는 것일까?



아이가 태어났을 때, 의사는 심장이 걸레처럼 엉망이라고 했다. 수술을 2~3번은 해야 할 것 같고, 수술해도 성공할 확률이 높지 않고, 심장 수술에는 성공한다고 해도 유전자 이상으로 인한 여러 병이 빈번할 거라고 했다. 나는 얼마 못 살 아이를 고통스럽게 병원에서 고생만 하다가 보내는 게 아닌가 싶어 심장 수술을 망설이기까지 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보자 하고 수술하기로 했을 때는 이미 수술 시기가 많이 늦어 있었다. 시기를 놓친 수술이라 수술도 힘들었고 수술 계획을 잡기 위해 허벅지에 있는 정맥으로 조영제를 넣어 심장 상황을 점검해야 한다고 했다. 담당 의사는 허벅지 정맥을 사용하면 그쪽 다리가 소아마비처럼 성장 장애가 올 우려가 있으니 다리 운동을 많이 시키라고 했다.



수술 후에도 걸핏하면 폐렴에 걸려 집보다는 병원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정밀검사를 해 보니 한쪽 폐의 허파꽈리가 자라지 않고 세균성 물혹이 되어있었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왼쪽 폐도 반을 잘라내었다. 그러느라 교육에 대해서는 생각도 못 했다. 생존이 우선이었으니까. 결국, 또래보다 2년이나 늦게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처음 병원에서 아이에 관해 상담받을 때, 의사는 다운 증후군의 특성상 나타나는 심장 문제, 갑상샘 문제를 설명하고, 그로 인하여 면역이 떨어지고 오래 살지 못할 거란 소견을 덧붙였다. 그의 말은 내 머릿속에 강하게 박혀왔다. 설사 오래 살지는 못한다 해도 살아있는 동안만이라도 행복하게 살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아내와 다운 복지관의 상담사나 특수교육 전문가라는 사람들을 참 많이도 찾아다녔다. ‘과연 이렇게 교육을 받으면 얼마나 좋아질까요?’라든가, ‘이런 교육을 받으면 아이가 좋아질 수 있을까요?’ 혹은 ‘좌뇌 발달, 우뇌 발달용 교육을 하면 지능이 얼마나 좋아지며 그럼 사회생활을 잘할 수는 있을까요?’ 하는 식으로 상담할 때마다 물어보았지만, 내 질문에 명확한 답을 해주는 이는 없었다. ‘그냥 안 하는 것보다 낫다, 전문가들이 만들었고 남들도 다 한다.’라는 식이었다. 그리고 일찍부터 특수교육을 하면 조금 나아진다고 영혼과 실체가 없는 말만 해 대는 것이었다.



가뜩이나 남들보다 짧은 인생을 살 아이에게 성과가 불분명한 교육을 하기엔 시간이 너무 아까워 특수교육을 조금 하다 그만두었다. 다만 아이가 사는 순간순간, 아프지 않고 건강하고 즐거워하면서 살았으면 했다. 그리고 남들에게 손가락질 안 받고 살게 하고 싶었다. 타고난 장애 때문에 누군가 그 앨 손가락질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문제니까 그따위는 아예 무시하고, 아이의 잘못된 행동으로 인하여 ‘장애가 있으니까 그렇지!’ 하는 비난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냥 집에서 우리가 필요할 것이라고 느끼는 대로 교육했다. 의사소통을 위한 말하기, 어른들에게 인사하기, 억지 안 부리기 등등. 이 아이들에 관한 제대로 된 교육 지침서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냥 교육의 비전문가인 아내와 내가 집에서 하는 생활에 관한 즉흥적인 교육이 아이 교육의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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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역을 키워서 좀 병원에 덜 가게 하려고 운동을 생활화했다. 수영과 해동검도 등 여러 가지 시켜 보고, 선생님께도 특별 지도도 맡겨봤는데 별 효과가 없었다. 그러던 중 태권도를 시켜봤는데 효과가 있었다. 물론 선생님을 잘 만난 덕분이겠지만, 심장 수술로 인해 앞으로 볼록 튀어나왔던 가슴도 들어가고 감기도 적게 걸리고 나중에는 승단 시험에서 2품까지 따면서 자부심도 생겼다. 처음 승단 시험을 준비하겠다는 태권도 사범 말에 나는 비판적이었다. 아니 의심을 품었다. ‘왜 안 되는 일을 하려고 하지? 괜히 장애아동을 가르쳐서 승단 시험까지 내보낸 훌륭한 사범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그러는 것 아닐까?’ 그런 식의 삐딱한 내 생각의 깊은 곳에는 근거 없는 편견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이 아이는 안 된다, 아무것도 못 할 거다, 하는 식의 부정적인 생각에 세뇌되어 있었다. 이 아이들은 왜 못할까? 왜 그럴까? 뭔가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긍정적인 생각을 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동안 만났던 복지 전문가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내가 주장하는 이야기 들은 거의 자기들이 알고 있는 이야기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들의 결론은 한결같이 이 아이들은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만났던 특수교사나 다운 증후군 아이를 둔 부모들도 모두 이 아이들의 무용론을 폈다. 발전이라는 개념은 없고 아이들이 그냥 시키는 대로만 잘 적응하도록 교육하는 정도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결국, 그들은 이 아이들은 안 되니까 아이들의 인권이니, 능력을 계발하면 쓸모가 있니, 등등은 이야기하지 말자, 다만 잘 보살펴주는 복지시스템을 만드는 게 아이들을 진정으로 위하는 길이다.라는 주장으로 나를 설득시키기 위해 참 대단한 노력을 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시도를 해봤을까? 어떤 걸 시도해보고 안 된다고 판단하였을까? 결론이 아니라고 나 있는 교육, 이 아이들의 특성을 무시한 교육 외에 무얼 시도해보고 연구해 봤을까? 나는 내 아이를 직접 키우면서 내 아이의 가능성을 봤다. 그리고 능력을 계발하면 얼마든지 제 몫의 일을 해낼 수 있는 이 아이들에게 그 기회가 원천적으로 봉쇄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 아이들의 억울함을 덜어주고 싶었다. 왜 전문가라고 자처하는 이들은, 아이들의 가능성을 보고 노력하는, 이 아이들의 억울함을 덜어보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까지 어렵다는 이유로 시도조차 하지 못하게 설득하려 들까? 전문가라면 오히려 반대여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의 특수교육 프로그램에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다운 증후군을 위한 교과서나 교육지침은 전혀 없었다. 의무교육 기간이라도 그걸 마련해 주는 게 당연한 게 아닐까? 특수교육에 자폐의 종류는 얼마나 분류되어 있으며 그에 따른 교육지침이나 방향이 있는지가 궁금했다. 그냥 특수교사 한 사람이 각 종류의 다른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데리고 일반 교과서로 수준을 낮춰서 돌봐줄 뿐이었다. 그런 게 교육일 수가 있을까? 남들과 다르게 태어났으면 그에 맞춘 교육지침이나 목표, 그리고 최소한의 교과서라도 만들어 놓고 의무교육을 해야 하는 거 아닐까? 교육의 효과가 떨어질 수 있다는 가정하에 교육을 아예 안 하는 것은 엄연히 인권의 유린이다. 비 장애 아이들도 이 아이들처럼 아무것도 안 시킨다면 어떤 능력도 계발되지 못할 것 아닌가? 이 아이들은 분명 교육부터 교육의 취지에 어긋나는 사각지대에 유폐되어 있었다.



우리는 인간성이란 말을 자주 쓴다. 그 인간성이 무엇일까? 네이버 철학 사전에 ‘인간이 가지는 본질, 인간다움을 말한다.’라고 나와 있었다. 말 그대로 인간의 본질적인 특성을 말한다. 결코, 기능적인 우열이 인간을 구분하는 기준은 아니다. 기능으로만 따지면 인간은 로봇보다 떨어지는 종이다. 컴퓨터보다 기억력이나 적용 능력이 떨어지니, 그런 능력으로 따지면 인간은 로봇보다 훨씬 열등하다. 차보다 느리고, 날지도 못한다. 물론 기계나 동식물들보다도 열등한 부분이 많다. 그런데도 인간이 우월감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바로 인간에게는 인간성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무리 지어 집단생활을 하는 동물이다. 그래서 모든 교육은 처음에 소통과 사회적응 등 인간의 공동체 생활질서에 맞춰 만들어졌고 그걸 기초로 그다음에 기능적인 것이 첨가된 것이다. 그러다가 차츰 물질문명과 경제가 발달하면서 개인주의가 되고 교육에 공동체 생활에 관한 교육이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아예 없어지다시피 해버렸다. 학교, 학원, 인터넷 등 교육할 수 있는 모든 곳에서 기능적인 교육만 하고 소통이나 도덕과 윤리, 예의범절 등의 교육은 사라진 지 오래다. 이제 교육은 교육이 아니라 기능의 전수이자 정보의 전달수단에 불과하다.



도대체 발달장애라는 말이 어떻게 생기게 되었는지를 찾다가 우연히 우생학을 접하게 되었다. 18세기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활발히 진행되던 시기에 급격히 발달한 물질문명을 배경으로 프랜시스 콜턴은 '우생학'을 주장했다. 이 콜턴의 잘못된 과학은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지금 유전학의 근원이라 할 우생학은 사람의 가계를 분석하여 우성 가계와 열성 가계를 구분한 다음, 우성 가계는 번식시키고 열성 가계는 단종을 시키자는 학문이다. 그 영향으로 당시 미국과 유럽에서는 강제 낙태법이 시행되기도 했다. 그리고 2차 대전 당시에는 독일의 나치와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인간을 생체 실험하는 만행도 저질렀다. 그 유명한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일본의 생체실험인 마루타 등은 우생학에 기초한 만행이었다. 참 부도덕한 학문이 바로 우생학인 것이다. 인간을 인간이 인간으로 적합한지 아닌지를 평가해서 종자를 없애고, 번식시킨다는 정말 교만의 극치에 달하는 이것을 학문이라 할 수 있는 것일까? 지능이 높은 사람끼리만 교배시키고, 키가 크고 얼굴이 예쁜 사람끼리만 결혼시키면 이 세상은 외모가 뛰어나고, 지능이 높은 사람들만 살게 된다는 단순 논리는 나름 그럴듯해 보인다만 과연 그러면 이 세상이 좋아지는 걸까? 행복해지는 걸까? 인간을 기능의 일부인 지능으로 평가하고 또 기능이 떨어진다고 멸종을 시킨다는 발상은 과연 인간으로서 온전한 발상이긴 하는 걸까? 그런데 그 학문이 과학이라는 미명 아래 사회문화의 전반을 지배해버렸다. 그 결과 우리 아이들은 남다르게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로 버려지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처음부터 격리 수용이 목적이 되어버린 아이들에게 어떤 교육적인 투자가 가능할까? 교육의 목적이나 내용이 있기나 하는 걸까? 병아리 감별을 해서 쓸모없는 병아리는 죽여서 사료로 쓴다. 이 아이들은 그래도 사람의 형태로 타고났으니 죽이지는 못하고 어릴 때는 부모가 돌보다가 나중에는 어딘가의 시설에 수용당해서 평생을 살다가 죽는다. 자기의 특성이 뭔지도 모르고, 자기의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 채, 인간의 존엄을 원천적으로 박탈당한 채, 강제로 수용되는 삶을 살다 죽는 것이다. 그게 그들을 위한 사회보장제도 중의 복지제도다. 과연 그것이 누구를 위한 복지제도인가? 거칠게 표현을 해서 거부반응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아름답게 표현해봤자, 그건 이 엄혹한 사실을 은폐하려는 위선적인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짓이다. 우리 사회의 일원이라면 당연한 권리인 의무교육조차 해 보지도 않고 그저 무탈하게 관리만 하는 것은 잔인하고도 비인간적인 외면인 것이다. 그 어떤 가능성도 시도해보지 않고 그냥 안 된다는 말만 계속하면서 부모에게, 주변 친지들에게까지 자기들이 전문가인데, 전문가의 측면에서 볼 때 안 된다고 세뇌해 버린다. 그러다가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보이는 아이가 있으면 그 아이는 특별하다는 것이다.



이 아이들 관련한 산업은 이미 거대해져 있다. 그런데 그 산업의 최종 목적은 격리 보호수용이다. 거기에 종사하는 사람들 또한 ‘수용해서 관리하기 좋은 시스템’이 목적일 것이다. 일하기 편해야 하니까. 정책 입안자나 특수교사나 복지사 등등 관련자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심지어는 부모들조차 마찬가지다. 결국, 이 복지제도는 장애 판정을 받은 사람들을 위한 복지제도가 아니라 그들을 관리 수용하는 사람들의 직업을 위한 복지제도다. 그러고는 의식이 있다는 복지사들이 모여 아이들의 인권을 존중하자, 이 아이들에게 의사결정권을 주자고 하고 있다. 이 아이들 교육의 정도가 의사 표현할 수 있을 만큼 되어있지 못한데 이 아이들이 어떻게 의사결정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할까? 아무 경험도 없고 교육도 받지 못한 아이가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을까? 어떤 의사결정을 하려면 정보도 있어야 하고 그 결정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고 이해가 되어야 하는 거지, 그냥 선택하는 것은 막말로 눈감고 복불복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어릴 때부터 교육으로 선택할 능력이나 의사 결정할 능력을 만들어주고 의사결정권을 줘야 하지 않을까? 근본부터 달라져야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내 아이가 특별하다고 한다. 물론 나도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엄밀히 말하면 아이는 특별하게 타고난 게 아니고 남들보다 특별한 과정을 겪은 것이다. 심장 수술, 폐 수술로 인한 교육의 타이밍이 맞지 않아, 일반 교육 시스템에 보내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집에서 생활교육, 예의 교육에 치중하게 되고 건강을 위해 운동을 꾸준히 시켰을 뿐이다. 그리고 의사결정을 할 때 꼭 이유를 물어본다. 아이에게 기회를 준다. 놀러 가거나 외식할 때 그의 의견을 묻고 그의 결정에 따라주면서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런 사소한 일로도 아이는 자존감이 생겼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시키면서 그냥 툭툭 칭찬을 던진다. ‘네가 없으면 어떡할 뻔했니? 진짜 잘한다.’ 그게 아이를 특별하게 만들어준 것이다. 잘한다, 는 칭찬에 2~3시간씩 책을 소리 내어 읽는다. 멋있다, 근육이 생기는데, 라는 소리에 2시간씩 팔 굽혀펴기, 윗몸일으키기, 누워서 다리 올리기, AB 슬라이드를 땀을 뻘뻘 흘리며 한다. TV 요리 프로그램을 보면서 ‘맛있겠다, 상욱이도 잘할 텐데’ 하면 볶음밥도 하고 설거지도 한다. 아이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우리 생활에 아이를 동참시켜서 역할을 주고, 자존감과 자신감을 심어 주었더니 그렇게 잘해 간다. 이게 특별한 것이다. 이런 특별함이면 아마 모든 아이가 다 특별할 수 있을 것이다.


공정함이란 같은 조건을 맞춰주고 같은 대우를 해주고 나서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우리 아이들에게 공정하게 교육하고 대우를 해주자는 것이다. 교육이 필요한 시기에 각자의 조건에 맞는 교육을 하고, 그들의 적성과 능력에 맞는 일터를 만들어주고, 그들이 스스로 만족할 만한 삶의 환경을 만들어주고 나서, 이 아이들이 쓸모가 있니 없니, 이야기해보자는 거다. 자기가 못해서 듣는 말은 그래도 참을 수 있지만, 타고난 신체적 지능적 조건으로, 즉 자기의 잘못이 아닌 조건으로, 소외당하고 버려지는 것은 정말 잘못된 것이다. 내 자식들의 문제는 그들의 잘못이 아닌 사회의 잘못과 나 포함 주변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라는 걸, 우리 모두 인정하고, 반성해야 한다. 그래야 잘못을 되돌려 놓을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2014년 글, 202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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