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몽실연필 Dec 18. 2021

아, 이 무례(2편)

(1편에 이어)

https://brunch.co.kr/@kyo3334/17


무례: 태도나 말에 예의가 없음.

대치상태였다.

카드 포스기가 올려진 데스크를 사이에 두고 양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소리를 지르는 카우보이와 손가락을 안으로 말아 주먹을 쥐기 시작한 알바생이 거기 있었다.


"제에..가...뭘 잘못했나요?"

댓돌로 가슴을 누른 듯 꽉 막혀버린 알바생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물음표였지만 사실 물어야 할 질문도 들을 대답도 없었다. 그는 할 일을 했을 뿐이고 잘못은 그에게 있지 않았다. 목소리를 누르고 눈을 감고 주먹을 쥔 채로 그 자리에 굳어버린 알바생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뭘 잘못해? 잘못했지 그럼!
넌 예의가 없어!"


말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저런 것일까. 앙칼지게 갈라진 가래 낀 목소리로 꽥꽥 소리를 지르는 저 카우보이 어르신의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폭주하고 있었다.


카우보이는 분명 예의라고 했다. 예의.

죽이나 팔고 있는 너 따위가 감히 나에게 예의가 없다고.


죽집 알바생에게 너라고 말할 수 있는 예의, 반말로 시작해 반말로 끝나는 예의, 다른 손님이 있거나 말거나 남의 영업장을 초토화시킬 수 있는 카우보이 어르신의 예의란 과연 어떤 것인지 궁금했다.


문제는 도대체 무엇때문에 그가 이리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짐작컨대, 카우보이 심연의 무언가가 건드려졌고  자신조차 화인지 비명인지 정체모를 감정에 휩싸이고 있다는 것만을 눈치챌 뿐이었다.


책을 포기한 나와 식사를 포기한 유니폼 그녀의 눈이 알바생을 향했다.


나는 알바생이 이 상황을 똥 밟았다 생각하길 바랐다. 알바생이 이 상황을 그의 자존감에 결부시키지 않길 바랐다. 이 무례한 카우보이를 개무시하길 바랐다.


살다보면 이렇게 기막힌 날들이 종종 있지만 세상엔 좋은 사람도 많다며 주먹 쥔 두 손을 감싸주고 싶었다.


그저 똥 밟았다 생각해라.
운동화는 빨면 그만이란다.
말해주고 싶었다.


알바생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저는 잘못한 게 없습니다!"

그의 눈이 푸른 안광을 내뿜고 있었다. 동공보다 흰 자위가 많이 보였다. 부릅 뜬 눈에서 나오는 살기가 테이블을 넘어 나에게까지 전달됐다. 주먹이 뻗쳐나가는 걸 의지로 막고 있는 두 팔은 달달 떨렸다. 자존심에 손상을 입은 인간이 극한의 분노에 휩싸인 모습이었다. 알바생의 주변은 푸른 살기와 끓어오르는 화로 활활 타올랐다.


카우보이 어르신은 "야, 사장 나오라 그래!"라고 말했다.

하지만 사실, 그는 당황하고 있었다.

 

분노한 인간이 내 뿜는 살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알바생은 젊었고 자신보다 큰 주먹을 가지고 있으며 둘 사이에는 알량한 데스크 하나 뿐임을 이제야 안 것이다.


카우보이는 사장을 나오라고 말했지만 그건 알바생의 분노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꼬리를 내리고 있었다. 주먹 쥔 알바생을 더 건드려봐야 자신에게 이로울 리 없다는 걸 늙은 카우보이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사장은 주방에서 나오자마자 상황을 묻지도 않고 죄송하다고 했다. 그냥 죄송하다고.


비로소 카우보이의 낯빛이 승리의 미소로 번들거렸다.

나는 아직 먹지도 않은 죽을 토할 것 같은 구역감을 느꼈다. 사장은 부들부들 떨고 있는 알바생의 등을 툭 쳤다. 들어가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알바생은 움직이지 않았고, 사장은 그의 등을 감싼 안은 후에야 주방으로 데려갈 수 있었다.


사장이 카우보이 어르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방역 전화를 하지 않으시면 고발당합니다."

고발, 고소 이런 것들은 카우보이에게 꽤나 무서운 단어였던 것 같다.


카우보이는 결국 이 난리소란을 피우 후에야,

이유도 진심도 없는 죄송하다는 말을 기어이 들은 후에야, 고소 고발이라는 말을 들은 후에야,


그제서야 부산스러운 몸짓으로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찾기 시작했다.


"사장한텐 미안하오! 헛 참. 직원교육을..." 이라며 카우보이는 얼버무렸다. 사장이 당신의 무례에 대해 고발하겠다고 말한 게 아닌데도 그는 그 말에 주눅들었다.


위풍당당하던 그는 맨 끝 테이블 구석에 앉아 주문을 했다. 사장은 거기 앉아서는 주문을 못한다고 했다. 카우보이는 어느새 말 잘듣는 아이처럼 데스크 앞에 서서 쇠고기 야채죽 하나를 계산하고 후미진 구석의 자리로 돌아갔다.



오랜 숙환으로 병원에 다녀오신,

초라한 행색으로 낮 두 시가 지나도록 식사를 못하신,

인생 시기 중 가장 나약한 몸으로 혼자가 된 할아버님 한 분이 거기 계셨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 이 무례 (1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