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몽실연필 Dec 22. 2021

마녀의 이유 (1편)

이유: 어떠한 결론이나 결과에 이른 까닭이나 근거. 구실이나 변명

파란 펄이 갈치처럼 번쩍거리는 눈두덩이와 5mm 아이라인은 마녀의 시그니처 화장법이었다. 둘 다 요즘은 찾아보기 힘든 룩이라 사람들은 마녀의 눈만 보고도 압도되었다. 두꺼운 데다가 꼬리를 길게 뺀 아이라인은 흡사 중국 선녀 같기도, 귀신같기도 했다.


그녀의 시그니처는 눈뿐이 아니었다. 마녀는 모피 중독자였다. 선들한 가을바람만 불어도 길이와 색이 다른 각종 밍크를 입었다. 워킹데이 닷새를 두 배로 쳐서 열흘 동안 같은 모피를 착용하는 일 따윈 마녀에게 없었다.


블랙의 롱 밍크, 귀여운 방울이 달린 숏 밍크, 하단이 밍크 열 마리쯤으로 삥 둘러 쌓인 코트도 있었다. 색, 길이감, 디자인이 모두 다른 별의별 밍크코트 열 벌을 매일 다르게 입는 것이 마녀가 가을, 겨울을 나는 방법이었다.


이런 마녀에게 공식적인 호칭이 따로 있었는데 불행히도 그건 내 '직장 상사'라는 타이틀이었다.


마녀는 사사건건 나를 괴롭혔다. 마녀는 마땅히 나를 부를 때 써야 할 호칭을 단 한 번도 쓰지 않았다. 단지 내 이름 석자 만을 느낌표 있게 질렀다.


그랬다. 아마도 질렀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녀가 잡아 입은 밍크처럼
놀란 눈으로 "네?"라고 답했다.
 
내 눈이 동그랗다 못해 똥그래지면
마녀는 깔깔대며 웃었다.


확실히 그녀는 그 놀이를 즐겼다.


마녀는 내 옷차림을 못마땅해했다. 치마를 입고 간 날에는 업무를 해야 하는 데 불편한 치마를 입고 왔다며 타박했다. 마녀 자신이 계절에 상관없이 짧은 H라인 스커트를 매일 입는다는 걸, 나를 타박하는 순간에도 펄 스타킹을 신고 다리를 꼬고 앉았단 걸 아예 모르는 것처럼 굴었다. 그녀의 일은 스커트를 입어도 할 수 있으나, 내 일은 그렇지 않다는 우월감을 으스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마녀의 타박을 들은 후 바지를 입고 출근했다. 그녀는 마녀였지만 내 직장 상사였으므로 그녀에게 인정은 못 받을지언정 최소한 다음 순번으로 잡힐만한 한 마리의 가련한 밍크는 되고 싶지 않았다. 마녀의 말이 맞건 틀리 건, 그건 이미 상관없었다.


뻗쳐오르는 굴욕감을 딛고, 나는 최선을 다해 그녀의 마음에 들고자 노력했다.


그런데 정작 내가 바지를 입고 간 날, 마녀는 직장에 펑퍼짐한 바지를 입고 출근하는 것은 예의가 없다고 말했다. 모름지기 직장이란 깔끔한 착장과 완벽한 화장으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준비된 사람이란 것을 각인시켜야 하는 법이라고 말했다. 이런 차림은 직장인으로서의 자세가 안된 거라며 동료와 다른 상사가 있는 자리에서 세차게 면박을 주었다.


마녀가 나를 괴롭히는 이유는 옷차림뿐이 아니었다. 어느 날 마녀는 잡아먹기 전 마지막 포식을 시키려는 듯 간식을 잔뜩 차려놓고 먹으라고 했다.


우리가 언제나 동화에서 봤듯이 마녀가 먹으라고 하는 음식엔 대개 독을 탔을 확률이 높다. 나는 먹지 않았다. 다이어트 때문이 아니었다. 그래도 한국의 예의상 쿠키 봉지 하나쯤을 까는 건 잊지 않았다.


헨젤그레텔의 마녀처럼 그녀는 내가 많이 먹지 않는다며 또 화를 냈다. 다이어트의 '다'짜도 꺼내지 않았는데 젊은 애들이 다이어트 때문에 망했다는 사회 철학적 명제를 쏟아내며 열분을 토했다. 그녀의 침이 튈 때마다 다른 사람들도 하나, 둘 뒷걸음치며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단 걸 마녀는 몰랐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사무실엔 택배가 오기 시작했다. 택배는 마치 프리벳가 해리포터에게 쏟아지던 호그와트 입학허가서처럼 빗발쳤다. 온갖 다이어트 제품이었다.


놀랍게도 수신자는 대국민 다이어트 증오 캠페인의 마녀였다.

내가 치마를 입든, 바지를 입든 그건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마녀는 단지 내가 싫었을 뿐이다. 하지만 사실 애초에 그녀와 나는 체급부터 다른 상대였다.


그녀는 직장 상사였으며 나와 경력 및 나이 차이가 최소 25년 이상이었다. 40대 후반의 안정된 삶의 그녀와 쥐뿔도 없던 20대 초반의 사회초년생인 나는 경쟁조차 되지 않는 게임 상대였다.


하지만 무슨 까닭인지 그녀는 나를 미워했고,

나 또한 그랬다.


나는 마녀를 온 힘을 다해, 최선을 다해서, 죽도록 증오했다.


그러던 어느 날,

(늘 그렇듯 동화는 '그러던 어느 날'로 시작된다.)


헨젤그레텔의 과자집을 지나가던 바람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2편에서 계속)


매거진의 이전글 아, 이 무례(2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