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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실연필 Dec 24. 2021

마녀의 이유 (2편)

누구에게나 이유는 있다

 https://brunch.co.kr/@kyo3334/19

이유: 어떠한 결론이나 결과에 이른 까닭이나 근거.
구실이나 변명.


헨델과 그레텔의 과자집을 부드럽게 살랑이던 바람이 전해준 동화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그리고 슬펐다. 그것은 구박받던 우아한 백조 같기도, 거품으로 사라진 꿈결 같은 인어공주 같기도 했다. 이 이야기는 한 소녀로부터 시작된다.

아주 오래전 한 소녀가 살았단다. 그 소녀의 아버지는 동네에서 내로라하는 금은방 주인이었어. 루비, 사파이어 같은 화려한 보석들과 번쩍이는 금덩어리가 금고에 가득한 부잣집이었지. 한 마디로 남부러울 것 없는 부잣집이었단 거야. 소녀는 다정한 아버지가 사다주신 프릴 달린 원피스와 에나멜 구두를 신고 누구보다 행복하게 자랐지.

온 동네 사람들이 그 집을 부러워한 건 부잣집이기 때문만은 아니었어. 소녀는 동네 아이들 중 누구보다도 영특했는데 공부도 잘하고 피아노도 잘 치고 게다가 그렇게 상냥했다는구나.

귀티 나게 품위 있고 착한 소녀.  
그래, 그 아이가 바로 금은방집 외동 딸내미였던 거야.

시간은 흐르고 어느덧 소녀는 숙녀로 자랐지. 숙녀가 된 소녀는 여전히 아름다웠어. 게다가 반짝이는 재능들로 그녀의 삶은 빛나기 시작했어. 그리고 신비로운 사랑이 시작됐지.

숙녀는 그를 정말 많이 사랑했어. 그도 숙녀를 사랑했지. 당연한 수순처럼 둘은 곧 결혼을 했어. 하지만 숙녀의 아버지는 걱정이 됐단다. 사업을 하느라 늘 바쁜 그가 숙녀를 외롭게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었지. 하나밖에 없는 딸이니까 아마 어떤 아버지라도 그랬을 거야. 하지만 숙녀는 아버지의 걱정을 뒤로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것으로 그와의 사랑을 증명하고자 했어.

슬픔 예감은 왜 틀린 적이 없냐는 노래 가사처럼, 아버지의 염려대로 어느새 그는 조금씩, 아주 많이 바빠졌어. 숙녀와의 사랑은 모두 잊은 것처럼 완전히 딴 사람이 되고 말았지.

숙녀는 그와 그녀를 꼭 닮은 두 아이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금은방의 보석으로도 그의 마음을 되돌릴 순 없었단다. 그는 결국 떠나고 말았어. 주머니에 숙녀 아버지의 보석을 가득 넣고 말이야. 그는 낯선 얼굴의 또 다른 숙녀와 손을 꼭 잡고 떠나고 말았던 거야.

그날 밤 숙녀는 마녀가 되기로 결심했어.
그토록 별처럼 반짝이던 그녀가 말이야.

나는 짙은 눈 화장 속에 가려진 마녀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근시용 안경과 돋보기를 번갈아 착용하며 모니터와 싸우고 있는 그녀의 눈을.  


그녀의 눈이 때로 눈물을 토해놓는 날이면 그녀가 오래도록 화장실 수도꼭지를 틀어놓고 나오지 않는다는 걸, 충혈된 눈으로 사무실에 들어올 때면 파란 아이섀도가 더 짙어져 있다는 걸. 그녀는 남겨졌고 또한 남겨진 사람들을 지켜야 할 가장이 되었다는 걸. 그녀가 마녀의 얼굴과 마녀의 목소리로 그녀 자신을 지키려 했다는 걸.


마녀가 나에게 한 모든 종류의 사악한 해코지 때문에 고통받았던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바람이 전해준 잔혹 동화에 더 힘들어해야만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로서는 그녀를 그냥 대차게 미워할 수 있었을 때가 더 편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럴 수가 없었다.


지구가 생긴 이래로 라볼 수 없었던 달의 뒷면처럼,

나는 허락되지 않은 그녀의 뒷면을 보았다.

               


해와 달, 흑과 백, 내 편 아님 네 편, 진실 아님 거짓. 착한 사람 아님 못된 사람. good or bad.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단 두 개로 나눠질 때가 있었다. 단순하지만 명쾌했던 시절이었다.      


착하고 좋은 사람은 아침 해와 같은 순수와 밝음으로 가득한 사람. 같이 있으면 편안하고 즐거운 사람. 주변을 향한 온화한 배려로 늘 따스함을 베푸는 사람.


나쁜 사람은 천성이 천박하고 경박해서 남에게 피해를 주며 염치없이 뻔뻔함으로 악행을 일삼는 사람. 무례하기 짝이 없으며 의식도 없이 남에게 상처 주는 사람.


이에 따른 대처는 간단했다.

전자의 사람과 교분을 쌓고 흠모하는 것,

후자의 사람에게서 될 수 있는 한 멀리 도망치는 것. 

그러므로 경멸하는 것.


이렇게 단 두 가지의 세상만이 존재한다고 믿었을 때는 차라리 살기가 쉬웠다.  


이제는 살기가 어렵다. 바꾸어 말하자면 세상이 더 이상 두 개로 나눠지지 않는단 걸 알아버렸다는 말이다.


좋지만 다 좋지는 않은 것. 선의지만 그 속엔 욕심도 얼마쯤은 있을 수 있다는 것. 오히려 악을 위한 100%의 악의는 없다는 것. 좋은 사람이 내게는 나쁠 수 있다는 것. 나쁘고 매정한 사람이 내게는 다정한 한 사람일 수 있다는 것. 좋든 나쁘든 거기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


백 명이면 백 명, 천 명이면 천 명.

누구나에게. 모두에게.

어떤 인생에도 이유는 있다는 것.

그 후로도 마녀는 바뀌지 않았다. 마녀는 늘 마녀였다. 오히려 변한 것은 나였다. 난 더 이상 마녀가 두렵지 않았다. 그녀를 무시하거나 동정해서가 아니었다.


허지웅의 말처럼 상처는 상처고 인생은 인생이다.


마녀에게도 이유는 있었지만 그녀 인생의 한 발을 내딛으며 나아가는 것은 그녀 자신의 선택일 수밖에 없다.


그녀가 자신을 지키는 방법으로 마녀로 분한 것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1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나는 인사철이 되면 그녀가 어떤 곳에서 일하는 지를 끊임없이 추적한다.


물론이다. 될 수 있는 한, 할 수 있는 한 그녀로부터 멀리 도망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건 거짓일 수 없는 참의 명제이다.


그 대신 나는 거울을 본다. 이제 곧 나는 마녀의 나이가 된다. 나는 마녀인가. 마녀가 되고 있나.

지금 나의 시그니처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으로 나의 가면을 삼고 있는가. 나는 무엇으로 나의 이유를 삼고 있는가.


오늘 밤에도 뜰 저 달의 뒷면에는 아직 마녀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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