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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실연필 Dec 03. 2021

갈피

잡지 못한 그것.

갈피: 일이나 사물의 갈래가 구별되는 어름. 곧 경계점.


탁상용 달력에 굵은 빨간펜으로 동그라미를 두 번이나 친 날짜는 이미 임박했다. '반드시 제출, 기한 엄수.'

비읍을 쓸 때 왼쪽으로 한 줄 내리고 오른쪽을 내리면서 둥글게 말아버린 모양, 모음의 아와 받침의 니은을 한 번에 휙 그어버린 글씨체. 저 글씨는 분명 내 글씨가 맞다. 근데 내 글씨가 이렇게 재수 없었나.


뭔가 대단히 잘난 체하며 내리깔아보는 듯한 저 글씨. 빈틈이라곤 없는 것 같은 도도한 저 글씨. 임박한 날짜만큼이나 완고한 저 글씨. 저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지금 난데없이 뱃속이 뿌글거리는 것만 같다.


제출 날짜는 다가오는데... 나는 어서 갈피를 잡아야 했다. 내게 주어진 업무를 구별하고 그 경계점에 서서 이 쪽이든 저 쪽이든 선택해야 했다. 저 빨간 날짜와 엇 박자를 더라도, 설사 삐끗하더라도 나의 생각과 의지로 온 맘을 다해 집중해야 했다.


이런 생각을 한 3초 정도는 했다. 정말이다. 그리고 믿을 수 없겠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나는 참 당위의 인간이구나.
인생을 뭐 이렇게 Have to로 살아.
뭐 죽고 사는 일이라고.

'죽고 사는 일이라고'를 되뇌듯 혀 끝에서 소리 내자 내 소리를 들은 오른손이 마우스를 탁하고 놓았다.

그리고 마치 도스의 명령어가 입력된 듯이 왼쪽 손가락들이 키보드에서 일제히 내려왔다.

오른쪽 다리가 왼쪽으로 포개어지면서 자연스럽게 허리와 어깨는 등 깊숙이 들어갈 것을 재촉했다.

숨을 훅 몰아쉬자 뭉친 어깨의 힘이 조금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온몸을 꽉 쥐고 있던 긴장을 리본 풀 듯 풀어내자 쿵쿵콩 쿵쿵콩 뛰던 심장이 콩. 콩. 콩 뛰었다.

안됐지만 계속해서 심란한 것은 저 빨간 동그라미와 검은 글자를 노려보는 내 눈뿐이었다.


갈피. 책갈피. 나는 갈피를 잡는 게 책갈피를 손에 쥐듯 손으로 만져지는 것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언제나 그것은 여기선 보이지 않고 저기만큼은 넘어가야 겨우 알 수 있는 알쏭달쏭한 것이었다.

그것은 손에 쥘 수 없는 뿌연 안개와도 같았다.

이 길인지, 저 길인지의 길목에서 내게 주어진 지도는 너무 작았고 그조차 정확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내게 갈피는 그저 빨리 지나가야 할 주황색 신호등 같은 표지판이었다.

급하게 지나다 넘어지고 자빠지는, 도통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엉뚱한 인생 표지판.

생각해보니 갈피를 못 잡고 헤맨 것이 비단 오늘만은 아니었다.

특차를 쓸지 정시를 쓸지, 정시를 쓴다면 가나다군은 어떻게 고를지, 세부 전공을 뭘로 할지, 실습지는 어디로 지, 크리스마스에 소개팅을 할지 말지, 그 남자를 한 번 더 만날지 말지, 시험을 어디로 칠지, 그 남자와 결혼을 할지 말지. 집을 살지 말지, 차를 바꿀지 말지, 이 일을 계속할지 말지.

생각해보니 지금 중요한 건 탁상달력에 빨간 동그라미 제출 날짜가 아닌 것만 같다.

갈피를 못 잡아 내 인생이 더 이상 꼬이면 안 되니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숨을 고르고 맑은 정신으로!


흠흠, 그러니까 내 말은...

말하자면 일이 하기 싫다기보다는 그러니까 내 말은. 흠.

저 일보다 내 인생 자체가 더 중요한 거 아닐까. 하는

뭐 그런 딴 생각이 든다는 거다.


원래 시험 기간에 읽는 로맨스가 달콤하고,

제출할 스무 페이지 리포트가 있는 밤이면 시청률 대박 터지는 드라마가 나오기 마련이고,

빨간 동그라미 친 기한 엄수의 제출 서류는 내 인생의 갈피를 다시 잡게 하기 마련이다.


나는 지금 갈피를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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