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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실연필 Dec 04. 2021

블랙아이스

생애 처음 경험한 완벽한 '블랙아이스'

8차선 도로를 주행하는 중이었다.

신도시를 계획하며 한껏 넓힌 횡성 방향 도로 위를 다정한 나의 스파크와 지나는 참이었다.

긴 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은 분주한 차들이 줄지어 신호를 기다렸다 이내 뿌연 연기를 토하며 내달렸다.

말이 8차선이지 8시 10분 이후는 서울에서나 볼 수 있다는 상습적인 트랙픽 잼이 발생하는 구간이기도 했다.

저녁 8시만 되어도 텅텅 비는 도로가 아침 8시만 되면 이 지경이라는 걸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매일이 그랬다.


여간해서는 차선 변경을 할 수 없는 이 병맛 도로는 솔직히 도로가 문제인지 내 스파크가 문제인지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우회전 깜빡이를 켜고 차선을 바꾸려 하면 옆 차선의 차들은 곧장 이륙이라도 할 듯 도로를 활주로로 만들었다.

눈 딱 감고 차 머리를 들이대면 대포 쏘듯 빵-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브레이크를 밟곤 했다.

마치 저 차 안의 사람들은 나를 아는 것같이 굴었다.

스파크 안에 타고 있는 인간 스파크는 분명 저 스파크처럼 작고 여릴 것이므로 우리 라인엔 절대 들어올 수 없다. 고 선언하는 것 같았다.

세상의 태초에 빛이 있었던 것처럼 도로의 태초에는 자본주의가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했다.


제법 떨리고 긴장되는 직진 주행은 매일이 그렇듯 여기까지였다.

이제 오른쪽으로 보이는 회색빛 15층 아파트를 끼고 우회전을 해야 할 차례였다.

기특하게도 오늘 스파크와 나는 4차선에 존재하는 데 성공했다.

매일 겪는 4차선 변경 프로젝트를 무사히 패스하면 이미 직장에 도착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푸근한 마음마저 들었다.

차선을 바꾸지 못해 한참을 더 간 후에 돌아가거나 다음 도로에서 우회전해서 거꾸로 올라가는 일을 만들지 않은 것만으로 순탄한 하루를 선물 받은 것이다.

그렇게 난 우회전을 할 때면 습관처럼 안도감을 느끼곤 했다.

바로 내 앞 차가 갈지(之) 자를 그리며 흔들리기 전까지는.


앞 차가 우회전을 하는 순간 보행자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고 15층 회색빛 아파트의 아이들이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앞 차는 아마 평상시처럼 브레이크를 밟았을 것이다.

그 구간의 우회전은 신호등을 늘 염두해둬야 하는 곳이란 것을 알았기에 앞 차도 절대 속도를 내지 않고 있단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속도를 내지 않았음에도 앞 차는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는 듯 좌우로 마구 흔들렸다.

방향을 종잡을 수 없는 저 차가 내 앞으로 오거나, 옆으로 비껴서 오거나, 내 옆 차선의 차와 부딪치면 당구대의 쓰리쿠션처럼 4중 추돌 사고가 나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었다.


그와 거의 동시로 내 브레이크 역시 핸들과 반대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앞 차를 따라 우회전을 하며 액셀에서 발을 떼는 동시에 반사적으로 브레이크를 잡았지만 나의 다정한 스파크도 미끄러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세상 숫자가 백까지라면 백만큼의 최대치로 심장이 뛰었다.

긴장하면 등에 식은땀이 흐른다고 하던데 나는 인중에 땀이 맺혔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핸들을 놓칠까 봐 온 몸에 힘으로 핸들을 잡았다.

눈도 오지 않았는데, 빙판도 아닌데. 도대체 이 상황이 뭔지 알 수 없었다.

생애 처음 경험한 완벽한 '블랙아이스'였다.

블랙아이스 : 기온이 갑작스럽게 내려갈 경우, 도로 위에 녹았던 눈이 다시 얇은 빙판으로 얼어붙는 현상. 도로 결빙 현상을 일컬음.

다행히 앞 차는 갓 길로 방향을 잡아 정차했다.

나의 다정한 스파크도 비상 깜빡이를 켜고 그 구간을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아무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두려움과 공포의 긴 하루였다.

종일 가슴이 덜덜 떨리고 어떤 일에도 집중이 안되며 퇴근길이 무서워지는 후유증이 생긴 것이다.


블랙은 블랙이었다. 블랙은 시크가 아니라 그야말로 블랙이었다.

한동안 신라면 블랙도, 새우깡 블랙도 먹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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