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몽실연필 Dec 04. 2021

블랙아이스

생애 처음 경험한 완벽한 '블랙아이스'

8차선 도로를 주행하는 중이었다.

신도시를 계획하며 한껏 넓힌 횡성 방향 도로 위를 다정한 나의 스파크와 지나는 참이었다.

긴 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은 분주한 차들이 줄지어 신호를 기다렸다 이내 뿌연 연기를 토하며 내달렸다.

말이 8차선이지 8시 10분 이후는 서울에서나 볼 수 있다는 상습적인 트랙픽 잼이 발생하는 구간이기도 했다.

저녁 8시만 되어도 텅텅 비는 도로가 아침 8시만 되면 이 지경이라는 걸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매일이 그랬다.


여간해서는 차선 변경을 할 수 없는 이 병맛 도로는 솔직히 도로가 문제인지 내 스파크가 문제인지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우회전 깜빡이를 켜고 차선을 바꾸려 하면 옆 차선의 차들은 곧장 이륙이라도 할 듯 도로를 활주로로 만들었다.

눈 딱 감고 차 머리를 들이대면 대포 쏘듯 빵-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브레이크를 밟곤 했다.

마치 저 차 안의 사람들은 나를 아는 것같이 굴었다.

스파크 안에 타고 있는 인간 스파크는 분명 저 스파크처럼 작고 여릴 것이므로 우리 라인엔 절대 들어올 수 없다. 고 선언하는 것 같았다.

세상의 태초에 빛이 있었던 것처럼 도로의 태초에는 자본주의가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했다.


제법 떨리고 긴장되는 직진 주행은 매일이 그렇듯 여기까지였다.

이제 오른쪽으로 보이는 회색빛 15층 아파트를 끼고 우회전을 해야 할 차례였다.

기특하게도 오늘 스파크와 나는 4차선에 존재하는 데 성공했다.

매일 겪는 4차선 변경 프로젝트를 무사히 패스하면 이미 직장에 도착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푸근한 마음마저 들었다.

차선을 바꾸지 못해 한참을 더 간 후에 돌아가거나 다음 도로에서 우회전해서 거꾸로 올라가는 일을 만들지 않은 것만으로 순탄한 하루를 선물 받은 것이다.

그렇게 난 우회전을 할 때면 습관처럼 안도감을 느끼곤 했다.

바로 내 앞 차가 갈지(之) 자를 그리며 흔들리기 전까지는.


앞 차가 우회전을 하는 순간 보행자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고 15층 회색빛 아파트의 아이들이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앞 차는 아마 평상시처럼 브레이크를 밟았을 것이다.

그 구간의 우회전은 신호등을 늘 염두해둬야 하는 곳이란 것을 알았기에 앞 차도 절대 속도를 내지 않고 있단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속도를 내지 않았음에도 앞 차는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는 듯 좌우로 마구 흔들렸다.

방향을 종잡을 수 없는 저 차가 내 앞으로 오거나, 옆으로 비껴서 오거나, 내 옆 차선의 차와 부딪치면 당구대의 쓰리쿠션처럼 4중 추돌 사고가 나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었다.


그와 거의 동시로 내 브레이크 역시 핸들과 반대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앞 차를 따라 우회전을 하며 액셀에서 발을 떼는 동시에 반사적으로 브레이크를 잡았지만 나의 다정한 스파크도 미끄러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세상 숫자가 백까지라면 백만큼의 최대치로 심장이 뛰었다.

긴장하면 등에 식은땀이 흐른다고 하던데 나는 인중에 땀이 맺혔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핸들을 놓칠까 봐 온 몸에 힘으로 핸들을 잡았다.

눈도 오지 않았는데, 빙판도 아닌데. 도대체 이 상황이 뭔지 알 수 없었다.

생애 처음 경험한 완벽한 '블랙아이스'였다.

블랙아이스 : 기온이 갑작스럽게 내려갈 경우, 도로 위에 녹았던 눈이 다시 얇은 빙판으로 얼어붙는 현상. 도로 결빙 현상을 일컬음.

다행히 앞 차는 갓 길로 방향을 잡아 정차했다.

나의 다정한 스파크도 비상 깜빡이를 켜고 그 구간을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아무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두려움과 공포의 긴 하루였다.

종일 가슴이 덜덜 떨리고 어떤 일에도 집중이 안되며 퇴근길이 무서워지는 후유증이 생긴 것이다.


블랙은 블랙이었다. 블랙은 시크가 아니라 그야말로 블랙이었다.

한동안 신라면 블랙도, 새우깡 블랙도 먹지 못할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복숭아 공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