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몽실연필 Dec 05. 2021

복숭아 공주

오늘 아침 그녀는 공주가 되었다. 어제와 같은 오늘을 맞이한 그녀는 난데없이 공주가 된 자신에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진갈색의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갓 구워진 소라빵처럼 돌돌 꼬았다. 감은 머리 위로 따뜻한 드라이 바람이 불었지만 어쩐지 뒷 목이 서늘했다. 지난여름 바다에 들어갔다 나왔을 때처럼 선뜻한 느낌에 살결이 오돌토돌 솟았다가 가라앉았다.


그녀는 이 머리로 바다에 들어간다면 리얼의 금발처럼 왕왕 커졌다가 작아지는 아코디언 머리가 될 수 있을까 잠시 상상해 보았다. 그건 아주 멋진 일이었다.


리얼은 바닷속에서도 우아하고 탱글한 컬의 웨이브 머리가 있었기에 기꺼이 목소리를 포기할 수 있었던 걸까.

그녀는 리얼의 그림 같은 바닷속 머리를 가질 수 있다면 지금처럼 목소리를 잃어도 좋을까 생각했다.



자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

토요일 밤에서 일요일 아침으로 이어지는 밤은 요일 밤이나 화요일 밤과는 다른 풍경을 가지고 있었다. 내일 아침 꼭 가야 할 곳이 없다는 건 그동안 갖지 못했던 뭔가를 소유한 것 같은 충만함을 주었다. 늦은 밤의 몇 시간을 책과 보내는 동안 그녀는 자신이 읽고 있다는 자체와 그것에 반응하고 있다는 사실에 벅참을 느꼈다.

  

후엔 가습기의 다이얼을 1시 방향부터 11시 방향까지 한 바퀴 돌렸고 마름모 모양의 퀼팅이 꼼꼼히 된 구스 조끼를 입었다. 너무 푹신해서 오히려 벨 수는 없었던 뚱뚱한 베개를 오른팔과 다리로 감싸듯 누워 안은 자세로 읽다만 책을 사이드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이내 잠이 들었다.

그녀가 까무룩 들었던 잠에서 깬 건 좀처럼 침을 넘기기 어려워서였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이물감과 답답함이 몰려왔다. 꼭 누군가 그녀의 편도선에 여름 내 먹었던 찐득한 복숭아 한 입을 억지로 욱여넣은 것만 같았다. 커튼 뒤는 아직 어둑했고 자도 될 시간이 많이 남았지만 오히려 누워있기가 힘들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입을 헹구고 가글을 하면 나아질 거란 희망으로 침대를 내려왔다. 하지만 어떤 방법을 써봐도 그녀 편도선의 복숭아는 그곳에서 더 익어갈 태세란 걸 확인할 뿐이었다.


그녀는 샤워기를 온수 방향으로 돌리고 흐르는 물의 온도를 손으로  확인한 뒤 머리를 감기 시작했다. 거품을 내고 깊숙이 손을 넣어 두피 곳곳을 문질렀다. 머리카락을 따뜻한 물로 충분히 헹구어 낸 그녀는 불린 미역 줄거리 같은 그녀의 젖은 머리를 마른 수건으로 재빨리 훔쳤다.


"병원을 가야 할 거 같아"라고 그녀의 입이 달싹거릴 때 그녀는 목에서 입으로 이어지는 조음 기관 중 어딘가에 손상이 생겼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모양말을 하고 있는데 발음으로 바꿔어줄 소리가 거기에 없었다. 아마도 그녀의 편도선 복숭아가 그 카랑카랑했던 목소리를 다 흡수한 듯했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은  리얼이 목소리를 잃은 건 마녀 때문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단 생각으로 흠칫했다. 어쩌면 인어공주는 그녀처럼 복숭아를 먹었을지도 모른다고, 긴 여름의 시간을 지나며 오래 익어서 득해진 복숭아를 한 입 삼켜서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그녀는 인어공주는 입을 수 없는 바지를 껴입고 두꺼운 후드 니트에 팔을 끼웠다. 빗을수록 탱글 해진다는 마법의 빗으로 공주가 된 그녀의 머리를 빗으며 리얼의 바닷속 머리를 생각했다. 


그녀는 외투는 입으며 그녀의 목소리를 찾으러 가기로 결심했다. 그녀의 편도선에 걸려있는 달콤하고 찐득한 복숭아를 빼버리겠노라 다짐했다. 그녀의 공주를 유지하고자 목소리를  포기하기엔 그녀의 머릿결이 이미 너무나 탐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녀는 어느새 병원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일요일 아침, 병원 로비는 복숭아를 빼러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흡사, 소란한 여름 같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NH콕뱅크와 숫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