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코로나는 맥주 아니냐?

by JEN

태국에서 지낸 지 3년이 되던 해, 일하던 곳에서 부당한 대우를 참지 못하고 나 스스로 그곳을 나오게 되었다. ‘딱 1년만 외국에서 일해봐야지’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이 생활이 눈 깜짝할 사이에 3년이나 흘렀더라. 오랜만에 한국에 돌아오니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러던 중 이전에 알고 지내던 다이빙 강사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윤식당 촬영지로 유명한 인도네시아 길리섬에서 일해볼 생각이 없냐는 제안이었다.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분이 오셨다. Covid-19

한국인 관광객이 주인 우리 다이빙 센터는 다른 센터들보다 먼저 코로나의 영향을 받았다. 뉴스에서는 한 교회에서 집단 감염이 생겼다는 소식이 흘렀고 며칠 지나지 않아 해외여행 자제 권고 소식이 들렸다. 그리고는 예약이 하나둘, 취소가 되기 시작했다. 우스갯소리로 "코로나는 맥주 아니냐?" 라며 까르르 웃으며 이야기했었는데 그때 당시에는 이 사태가 심각할 줄 몰랐고 더욱이나 이렇게 장기간 이어질 줄은 알지 못했다.

처음에는 마치 휴가를 받은 것 마냥 즐거웠다. 사실 내가 살았던 곳은 휴양지지만 그동안 나의 삶은 풍경처럼 여유롭지 못했다. 스쿠버 다이빙 강사의 특성상 몸으로 하는 일을 하다 보니 저녁에 집에 와서는 곯아떨어지기 바빴고 쉬는 날이면 집에서 잠만 잤다.

이쪽 세계는 일하는 만큼 인센티브 형식으로 월급을 받는다. (물론 아닌 곳도 있다.) 먹고살기 위해서라면 몸에 열이 펄펄 나도, 생리 기간에도 바다에 들어가야 했다. 또한 내가 급작스럽게 일을 빠지게 된다면 대체할 수 있는 인력이 많지 않기에 동료들에게 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 모두들 이런 힘듦을 감수하고 하는 일 이었다. 그럼에도 일하는 순간만큼은 후회 없이 행복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고민도 커졌다. ‘도대체 나는 이 일을 몇 살까지 할 수 있을까?’ 확실히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와 비교하면 육체적으로나 심적으로나 지쳐가고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열정 하나로 여기까지 달려왔는데, 불꽃이 꺼져가는 내 모습에 좌절감을 느꼈다. 이렇게 나는 매너리즘에 빠져가고 있었고 때마침 코로나 19, 팬데믹이 발생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길리섬을 이어주는 모든 배편이 끊겼다. 그제야 나는 상황을 실감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당장에 수입이 없다는 사실이, 이 수입 없는 상황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사실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기는커녕, 그 어느 때보다 덤덤했다.




섬이 봉쇄되고 몇 주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점점 늦게 일어나는 시간이 많아지고 때로는 점심에 눈을 떴다. 기분이 몽롱했고 많이 자면 잘 수록 피곤했다. 그러다 도저히 이런 하루를 반복하고 싶지 않아 매일 아침 새벽같이 일어나 여느 때와 같이 사무실로 출근했다. 제일 먼저 길고양이들의 밥을 챙겨주고 얼음을 꽉 채운 아메리카노를 만들었다. 그러고는 EBS 무료 인도네시아어 강의를 들었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미뤄 놓은 인도네시아어 공부를 드디어 시작했다. 보고 싶었던 드라마, 영화도 잔뜩 보고 해변에 누워서 좋아하는 노래를 백번, 천 번 반복해서 들었다.

그리고 동네 청년들에게 서핑을 배우기 시작했다. 서핑을 배우면서 나처럼 섬에 갇힌 각기 다른 나라에서 온 친구들을 만났다. 세상은 펜데믹으로 혼란스러웠지만 완벽하게 봉쇄된 그 섬은 마치 우리만의 비밀스러운 낙원 같았다. 바깥세상의 소란은 먼 이야기처럼 느껴졌고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를 배경으로 서핑을 즐겼다. 큰 파도가 오는 날엔 얼마 남지 않은 동네 사람들, 아이들, 자발적으로 갇힌 외국인들, 이렇게 하나, 둘 해변으로 모여들었다. 거대한 파도를 타는 서퍼들을 구경하러 나 온 그들의 모습은 마치 축제를 즐기는 듯했다. 감탄사와 웃음소리가 여기저기 터져 나왔고, 모두의 얼굴에는 설렘과 흥분이 가득했다. 삶이 회복되고 있는 것 같았다.

텅 빈 거리, 아무도 없는 에메랄드빛 바닷가, 관광객이 사라진 길리섬은 그 어느 때보다 눈부셨다. 우리 집 정원에 파파야 나무가 있다는 것을 인제야 알아차렸다. 난생처음 초록색 파파야가 주황색으로 익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모든 것이 멈춘 세상에서 내 시간은 참 잘도 흘러갔다. 섬 바깥에는 역병이 돌고 있고 수입도 끊긴 체 갇혀 있었지만 묘하게도 모든 것이 평안했다. 코로나가 끝나면 다시 현실과 마주해야 하는데 도저히 그럴 자신이 없었다.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냥 당분간은 현실은 잊고 현재에 살아보고자 했다.


나도 안다. 이 코로나 상황이 모든 사람에게 힘든 시간이었음을. 하지만 외람되게도, 나는 이 시간이 사라질까 두려웠다. 그렇게 나는 마주해야 할 나의 문제들을 잠시 미뤄두고, 잃어버렸던 나만의 시간을 찾으며 현재에 집중했다. 서핑을 배우고, 인도네시아어 강의를 몇 번을 반복했을까? 그러던 중, 섬과 섬 사이의 봉쇄가 풀렸고 길리섬을 떠날 수 있는 배편이 다시 생겼다. 그 후, 나는 바로 발리로 향했다. 물론, 팬데믹은 여전히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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