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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N Oct 26. 2024

41. 에필로그 <근황>

집, 가뭄, 빨래, 고양이 그리고 엄마

근황 1 - 단독주택은 살아 있는 생명체 같다.

새로 지은 집으로 이사 온 지 이제 2년이 다 되어 간다. 그리고 올해 10월이 지나면서 발리 생활도 6년 차에 접어들었다. 단독주택에서의 생활은 그동안 지냈던 홈스테이나 한국의 아파트와는 사뭇 다르다.

매일 아침 현관문을 열면 내가 돌봐야 할 정원이 펼쳐지고, 잡초는 또 어찌나 빨리 자라는지 잡생각이 들 때마다 마당에 나가 잡초를 뽑는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정원도, 내 생각도 한결 정리된다.

6개월에 한 번씩 나무데크에 오일을 발라준다. 그래야 나무가 상하거나 갈라지지 않고 오랫동안 견고한 형태를 유지할 수 있다.

물 필터는 두 가지가 있는데 PP필터는 3개월마다 교체하고 CTO필터는 6개월마다 교체한다. 교체 주기를 챙겨 미리 필터들을 주문한다.

화장실 정화조 역시 6개월에 한 번씩 미생물 종균제를 보충해 주고 토질 보호를 위해 클로린도 넣어준다.

주기적으로 집을 돌며 외벽을 살피고 혹시라도 개미가 줄지어 다니면 그 길에 약을 뿌린다.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으면 미리 배수로를 점검한다.

담벼락의 야외등이 나가면 전구를 교체하고, 야외 CCTV가 꺼지면 벌레나 물기 탓일 때가 많아 커버를 열고 깨끗이 닦아준다.

내가 물을 사용하지 않는데도 펌프가 작동하면 어딘가에서 물이 새고 있다는 신호이니, 물이 잠기지 않은 수도꼭지를 찾아 나선다.  

이렇게 집을 세심하게 돌보는 것이 처음엔 조금 번거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 일들이 내 삶의 리듬이 되고 소소한 보람이 되었다. 햇빛이 강하고 비가 잦은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금방 낡고 헌다. 단독주택은 마치 아이 같아서 손길이 닿지 않으면 금방 티가 난다. 그만큼 돌봄이 필요하고 그 돌봄의 과정 속에서 이 집도, 이곳에서의 내 삶도 조금씩 깊어진다. 아참, 아직 곰팡이가 핀 곳은 없다.


근황 2 - 이런 걱정을 하면서 살 줄은 몰랐지.

수도꼭지를 틀었는데 물이 나오지 않았다. 물 펌프를 확인해 보니, 펌프는 작동 중이었지만 물탱크에 물이 없어 헛돌고 있었다. 원래 물탱크에 수위 센서가 있어 일정 수위 이하로 내려가면 자동으로 물을 채워야 하는데, 센서 고장이 의심되어 전체적으로 교체를 했다.

그러나 문제의 원인은 따로 있었다. 우물의 수위가 낮아져 파이프 끝까지 물이 닿지 않아 물을 끌어올리지 못했던 것이었다. 결국 우물의 파이프를 연장해서 겨우 물을 끌어 올 수 있었다.

작년 우기에는 비가 많이 오지 않아 발리 전역이 가뭄에 시달렸다. 가뭄이라 하면 나와는 큰 관련이 없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지하수를 주로 쓰는 발리에서 집의 우물 수위가 낮아져 파이프 연장 공사를 하고 나니 사태의 심각성을 온몸으로 느껴졌다. 게다가 그린벨트에 무분별하게 지어지는 호텔과 빌라들도 물 부족을 야기는 원인 중 하나다.

그 후로 나는 가뭄을, 물 부족을, 기상 이변을 걱정한다. 작년에는 엘리뇨 현상으로 인해 가물었다고 들었는데 올해는 반대로 라니냐라고 하니 양껏 비가 내려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최근 1-2년 사이에 이상 기후로, 무분별한 개발로 섬의 많은 것들이 급하게 변하고 있음을 느낀다. 발리가 언제나 무사하길!


근황 3 - 빨래할 때가 제일 행복해

발리에는 저렴한 가격에 빨래를 대신해 주는 빨래방이 많다. 동남아는 다 비슷한지 태국에 살 때부터 늘 빨래는 빨래방에 맡겼는데, 집안일 중 특히 빨래를 싫어했던 나로서는 빨래방 덕분에 해방감을 느낄 정도였다.

하지만 빨래방에 빨래를 맡기면 가끔씩 옷이 사라진다. 특히 아끼던 티셔츠를 잃어버려 속상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한번 잃어버린 옷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반대로 남의 옷이 섞여 돌아오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그냥 옷은 그래도 괜찮은데 속옷은 너무 하잖아!

게다가 세제를 충분히 쓰지 않는지 빨래에서는 항상 꿉꿉한 냄새가 났고 그 냄새를 덮으려고 뿌리는 싸구려 방향제 향도 점점 거슬렸다.

이런 경험을 5년 넘게 겪다 보니, 내 집에 대한 로망 중 하나가 바로 세탁기였다. (발리는 세탁기가 없는 렌트 하우스가 생각보다 많다). 요즘 나는 내가 원하는 때에 직접 빨래를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 행복하다. 세제와 섬유유연제를 충분히 넣어 빨래를 하고 탁탁 털어 빨래를 널 때면, 작은 희열을 느낀다.


근황 4 - 홀리 몰리는 잘 지낸다.

홀리는 낯가림이 심하지만 한번 마음을 열면 마음을 다 줘 버리는 아이이다. 사람을 좋아하고 은근히 관심받는 것을 즐기지만 본인이 좋아하는 사람한테만 관심받고 싶어 한다. 집돌이라서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하고 숨숨집에 들어가 있는 것을 좋아한다. 스킨십을 좋아해서 자는 동안 만져주면 금세 골골송을 부른다. 고양이들이 보통 배를 만지는 걸 싫어한다고 하지만, 홀리는 배든 발바닥이든 어디를 만져도 잘 참아준다. 아주 보살이다. 처음엔 과묵했던 아이가 요즘은 말이 많아졌다.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면 야옹야옹 잔소리를 해대며 나를 하루종일 쫓아다닌다.

몰리는 겉으로 보기에는 깍쟁이 여우처럼 보이지만 사실 알고 보면 홀리 보다 더 사랑스러운 구석이 있다. 피곤하면 애기처럼 찡찡거리다가 꼭 내 옆으로 와 몸을 기대 잠이 든다. 몰리는 평소에는 스킨십을 용납하지 않지만 본인이 원할 때는 한없이 관대해진다. 특히 자기 전에 쓰다듬어 주는 것을 좋아하고 몰리의 골골송은 홀리 보다 아주 크고 우렁차다. 그리고 꾹꾹이 액션도 아주 커서 마사지샵에 아르바이트를 가도 될 정도다. 몰리는 집 보다 바깥에 나가 있는 것을 좋아하고 가끔 새나 쥐를 잡아 오기도 한다. "고맙지만 언니는 배불러 몰리야." 가끔 몰리는 외박을 하고 들어오기도 하는데 참 신기하게도 외박하는 날은 항상 금요일 밤이다. 그래서 나와 내 남자친구는 몰리를 Party Kucing(파티하는 고양이)이라고 부른다. 우리 집에서 가장 E의 성향을 가진 인싸 고양이다.


근황 5 - 엄마는 발리에 무려 여섯 번을 왔다 가셨다.

우리 엄마는 올해 은퇴를 하셨다. 그리고 무려 여섯 번이나 발리에 왔다 가셨다. 물론 그중 첫 번째는 팬데믹 전에 내가 길리에서 일하고 있었을 적에 오신 거다. 이렇게 발리를 부산 가시듯 오시는데 비행기표가 아까우니 오래 있다 가시라고 해도 한국에 약속도 있으시고 모임도 있으셔서 이게 좋다고 하셨다.

매번 발리에 오실 때마다 가고 싶은 곳이 없냐고 엄마에게 물어보면 요즘 우리 엄마는 "집이 젤 좋아."라고 하신다. 하긴 이미 여섯 번이나 발리에 오셔서 엄마는 발리 곳곳 안 가본 곳이 없으시다. 그렇게 엄마는 하루 종일 집에서 넷플릭스도 보셨다가 테라스에서 커피도 마셨다가 홀리몰리와 잠시 놀았다가, 이렇게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시다 다시 한국으로 가신다. 나는 엄마가 오시면 매일 아침, 점심, 저녁을 호텔 식사 부럽지 않게 풀코스로 차려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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