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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N Oct 26. 2024

39. 진심이 짓는다.

발리에 <내 집짓기>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다. 캐리어 하나만 들고 시작한 발리 생활인데 이제는 어엿한 내 집을 갖게 되다니! 처음 집에 들어가니 어색한 기운이 감돈다. 아직은 서로 친해질 시간이 필요했다. 찬찬히 집을 살폈다.

이 집은 발리 하면 떠올릴 수 있는 어떤 특별한 외관의 집은 아니다. 직사각형의 아주 평범한 건물이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다. 그래서 이 집의 진가는 직접 살아봐야 드러난다.

처음엔 집으로 들어오는 대문을 나무로 만들까 했는데, 내가 여자인 점을 고려해 조금 더 가벼운 철문으로 바꾸기로 했다. 옆으로 미는 방식의 문인데, 몇 번 왔다 갔다 하며 열어보니 이 문도 무거운 편이라 만약 나무로 만들었다면 힘이 많이 들었을 것 같다.

이 철문은 펀칭 타공이 된 문이라 시야가 막히지 않아 개방감이 있어 좋았고 누군가 방문했을 때 밖에 나가 보지 않아도 일층 창문으로 살짝 내다보면 밖에 누가 있는지 보이는 이 부분도 참 마음에 들었다.

대문 바로 옆에는 아주 작은 문이 하나 있는데, 이 문은 쓰레기를 버리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져 굳이 대문을 열고 나가지 않아도 쓰레기를 쉽게 버릴 수 있다. 처음엔 대문과 쓰레기통이 그리 멀지 않으니 꼭 필요할까 싶었지만, 없어서는 안 될 만큼 사소하지만 유용한 부분이다.

집으로 가는 길은 보도 블록을 깔고 공간을 확보했다. 혹시라도 나중에 차가 생긴다면 이곳에 차 한 대 정도는 주차할 수 있다.

대문을 지나 집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은 꽁꽁 숨겨져 있다. 대문에서 정면으로 바라보면 집으로 들어가는 문은 보이지 않는다. 대문이 타공판이라 밖에서도 안이 훤히 보이는데 출입문이 숨겨져 있고 작은 창문만이 보이기 때문에 프라이버시가 문제 되지 않는다.

출입문 윗쪽에는 작은 지붕이 있어 충분히 비를 피할 수 있다. 비 오는 날 문 앞에 택배를 놓고 가도 택배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

수질이 좋지 않은 발리의 지하수를 깨끗하게 해 줄 필터는 이중으로 설치했다. (참고로 발리에서 이런 필터가 설치된 집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리고 필터가 햇빛을 너무 많이 받으면 그 안에 녹조가 생기기 쉬워 그 위에 지붕을 만들어주고 옆으로는 대나무 발을 달아 그늘진 환경을 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

물의 석회질을 없애는 연수기도 설치하고 싶었지만 유지비용을 고려해 지금은 설치하지 않았다. 필요하면 추후에 설치 예정이다.

물탱크는 뜨거운 물을 콸콸 써대도 충분할 정도로 큰 탱크를 설치했다. 앞으로는 뜨거운 물이 떨어질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집으로 들어오면 가장 먼저 거실 통창이 보인다. 아침에 해가 뜨면 햇빛은 오전 내내 이 통창으로 들어와 내리쬐고 점심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사라지면서 그늘이 생긴다. 그늘이 생겨도 여전히 자연광은 충분해서 낮 내내 전등을 켜지 않아도 밝다. 게다가 에어컨을 틀어 놓지 않아도 집은 시원하고 쾌적하다.

통창의 크기와 높이가 아주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 일조량이 너무 과하지도 적지도 않다. 또한 담의 높이도 적절해 이웃과의 프라이버시 마찰이 전혀 없다. 이

모두 덕분에 답답하게 커튼을 달아 놓을 이유가 전혀 없다.

통창 옆으로는 데크로 바로 나갈 수 있는 문을 만들었다. 차양을 충분히 넓게 설치해 비가 오는 날에도 데크에는 비가 들이치지 않고 햇볕이 센 날에는 충분한 그늘을 만들어 준다. 비 오는 날, 데크에 앉아서 빗소리를 들으며 커피를 마시면 이것은 그야말로 낭만이다.

공간이 크던 작던 가능하면 모든 면에 창문을 뚫었다. 집 안의 모든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키면 바람이 잘 부는 날에는 공기의 움직임이 느껴진다. 게다가 발리에는 찾아볼 수 없는 방충망이 모든 창문에 설치되어 있어 벌레 걱정 없이 마음 놓고 문을 열어 놓을 수 있다.

콘센트는 넘치도록 설치했다.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았던 위치의 콘센트도 살아보니 다 쓸모가 있었다. 없었으면 오히려 아쉬웠을 것 같다. 그리고 집 전체의 전기 인입도 충분히 크게 모자라지 않게 했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벽은 일층의 다른 벽과 다른 게 진한 회색이다. 하지만 어둡게 느껴지지 않는다. 계단에 자연광이 내려올 수 있도록 계단 끝에 가로로 긴 창을 냈다. 이곳 역시 낮 내내 전등을 켜지 않아도 충분히 밝다. 계단 등 스위치는 위쪽과 아래쪽 모두 달아 위에서도 아래서도 불을 켰다 끌 수 있게 했다.

이층은 프라이버시와 온도를 고려해서 통창을 만들지 않았다. 대신 가로로 긴 창을 냈다. 홀딱 벗고 다녀도 밖에서 이 창으로는 내 몸이 보이지 않는다.

계단 옆 천장에는 대용량의 에어컨을 설치했다. 이층에서 에어컨을 켜면 그 바람이 계단을 타고 일층까지 내려가 온 집이 충분히 시원하다. 게다가 이층에 커튼을 내려 햇빛을 차단하면 에어컨을 꺼도 온도가 충분히 유지된다.

침대 해드 쪽 상단에 공기가 순환할 수 있도록 뚫린 벽돌을 쌓았다. 그 뒤편으로는 드레스 룸이 있는데 에어컨 바람이 뒤편까지 잘 도달해 고루 쾌적하다. 옷에 곰팡이가 생길 일은 없을 것 같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 어린왕자, 생택쥐페리


이 집은 그저 벽돌과 콘크리트로 쌓은 건물이 아니다. 각 방을 연결하는 공기의 흐름, 자연스러운 빛의 떨어짐, 바람이 들고나가는 창문의 방향, 온도의 변화, 그리고 발리의 우기와 건기를 미리 고려한 이런 설계는, 사실 그 누구도 한눈에 쉽게 알아차리기 어렵다. 그렇지만 집 안에 머무는 사람은 안다. 집이 안겨주는 편안함과 안정감 그리고 쾌적감은 단순한 물리적 공간을 넘어, 이 집을 지은 사람의 배려와 마음이라는 것을.

나는 내가 원하는 집이 어떤 집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이를 짓는 방법은 알지 못했다. 실제로 집을 구현해 준 사람은 바로 조로님이었다. 나의 바람에 조로님의 사려 깊은 마음이 더해져 이 집이 완성이 됐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신경 쓴 집,

본질적인 가치를 담고 있는 집,

내가 그토록 짓고 싶었던 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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