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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N Oct 26. 2024

40. 고양이와 함께 시작된 발리의 새로운 시간

발리에 <내 집짓기> 그런데 고양이를 곁들인

이사를 한지도 어느덧 세 달이 지났다. 그 사이에 국제보건 기구 WHO 에서는 국제 공중보건 비상사태 종료, 즉 팬데믹의 종료를 발표했다. 모든 게 제자리를 찾고 생활은 점점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 밖에 인기척이 들려 밖으로 나가보았다. 대문 밖에 십 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쭈뼛쭈뼛하며 서 있었다. 우리 집을 찾아온 것 같은데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대문을 열자 이 아이들은 대뜸 아무 말도 없이 꾸벅 인사를 했다. 이 아이들은 이미 나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여자 아이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아주 가득했는데 마치 그것을 숨기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눈을 깜박이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남자아이는 아주 잘생긴 아이였는데 주변머리가 없어 보였다. 멀뚱멀뚱 여자 아이 뒤에 숨어 역시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계속 보니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도저히 떠오르지가 않았다. 어디서 왔어? 이름이 뭐야?라고 말을 걸어봤지만 둘 다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두 아이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쳤는데 이 눈, 본 적이 있는 눈이었다. 깜짝 놀라 설마!라고 생각하는 순간 꿈에서 깼다.


이 꿈을 꾼 날은 내가 입양하기로 한 고양이 남매 홀리와 몰리가 처음으로 우리 집으로 오는 날이었다. 이 날은 우기가 한참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하루 종일 비가 어마어마하게 내렸다. 약속한 시간이 되자 홀리, 몰리의 임시보호를 해 주셨던 조로님의 차가 문 밖에 보였다. 그렇게 폭풍우를 뚫고 고양이 남매가 마침내 우리 집으로 왔다.

홀리와 몰리는 잔뜩 겁을 먹었는지 집에 오자마자 꼬리가 축 늘어져서는 이층위로 뛰어 올라갔다. 눈이 똥그랗게 커져서는 무서워하는 모습이 안쓰러워 츄르를 하나 뜯었다. 그랬더니 몰리는 조심스럽게 내려와 츄르 하나를 맛있게 다 먹었다. 그런데 홀리가 문제였다. 홀리는 하루종일 밥도 츄르도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현관 앞에 앉아 닫힌 문만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임시 보호를 해주셨던 조로님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내가 괜히 잘 지내고 있는 홀리한테 몹쓸 짓을 한 것 같아 마음이 안 좋았다. 그렇게 홀리, 몰리와 함께 첫날밤을 보냈다. 아니 우리는 함께 밤을 지새웠다. 홀리와 몰리는 낯선 집이라 무섭고 나는 고양이가 처음이라 무서워 잠 못 이룬 밤이었다.


다행이게도 다음날부터는 홀리가 밥을 먹기 시작했다. 몰리는 홀리 보다 먼저 마음을 열어 벌써부터 애교도 부리고 내 몸에 기대어 낮잠도 잤다. 몰리도 대견하고 내 자신도 대견했다. 홀리는 시간을 두고 기다려줘야지 싶었다. 고양이도, 사람도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을 때 홀리와 몰리를 밖으로 내보내 주었다. 엥? 하고 놀랄 수도 있는데 발리에서는 이렇게 산책냥이로 키우는 게 흔한 일이다. 그리고 홀리와

몰리는 원래부터 밖에서 자란 아이들이니 집 고양이와 결이 조금 달랐다. 일주일이 지나니 몰리는 몸이 근질근질했는지 내보내 달라고 연신 문을 긁어댔다.

그래도 걱정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었다. 홀리랑 몰리를 내보내고 혹시라도 집에 못 돌아오지는 않을까 하루종일 전전긍긍했다. 그래도 어릴 적부터 이곳에서 자란 애들이고 충분히 똑똑한 아이들이니 금방 알아 체고 다시 돌아와 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렇게 한 두, 세 시간쯤 지났을까? 홀리몰리가 집으로 다시 돌아와 문을 열어달라고 문 밖에서 냐옹거렸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반가운지 함께 지낸 지 일주일 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정이 들어 버렸나 보다. 돌아온 홀리와 몰리는 왠지 어렸을 때 지냈던 이곳을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둘은 밖에 나갔다 와서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연신 골골거리며 사료 한 그릇을 뚝딱 먹어 치웠다.


 "너네 기억하지? 너네가 지냈던 곳이잖아!"


밖에 나갔다 온 홀리와 몰리는 그날, 우리 집에 온 이례로 가장 단 잠을 잤다. 홀리와 몰리의 얼굴이 훨씬 더 편해진 것 같아 마음이 놓였고 어느새 홀리도 마음을 열었는지 나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렇게 나는 본격적으로 홀리와 몰리를 모시고 사는 집사가 되었다.

홀리와 몰리를 키우기 시작한 후, 발리 생활이 이전보다 훨씬 안정된 느낌이 들었다. 혼자 사는 집에 따뜻한 생명체 두 마리가 함께 하니,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공간의 한층 생기 있고 포근해졌다. 매일 집에 돌아올 때마다 냐옹거리며 잔소리해 주는 홀리, 몰리 덕분에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았다. 이렇게 홀리몰리와 함께 하는 시간이 쌓여 갈수록 발리에서의 일상이 더욱더 단단해져 갔다.


고양이 눈을 가지 두 아이가 꿈에 나온 그날,

잠에서 깬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 어쩌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발리에서 더 오래 살 것 같아. 이제는 아무 데도 갈 수가 없겠군!“



우리 집이 지어지기 시작한 첫 날,

공사 현장에 버려진 이 두 고양이들은

결국엔 내 가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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