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있는 둘: 같은 사람 아닌가?
나는 어려서 생각하는 것이 어린애 답지 않다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다. 어른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도 거의 없었고 또래친구도 없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혼자 생각하고 나만의 생각을 정립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몸이 약해 병원 옆에서 살며 통원치료로 병마와 싸우느라 친구도 가족도 없이 늙으신 유모엄마와 둘이서만 살았다. 심심해하면 유모는 동네 아이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집으로 데리고 왔다. 우리 집에는 많은 간식거리가 쟁여있었고 장난감도 많았다. 특히 50년대 말 장난감이 귀하던 때에 똑바로 눕히면 눈을 감는 커다란 인형은 동네 친구들이 우리 집으로 순수히 끌려오는 동기가 되었다. 지금도 어렸을 적의 기억을 꽤 또렷하게 떠올리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집으로 온 친구들과 함께 놀던 기억은 전혀 없다. 나는 장난감을 내어주고 그냥 먼발치에서 그들이 노는 모습을 쳐다보던 기억만 있다.
친구들이 돌아간 후 방바닥에 내팽개쳐진 인형은 지쳐 보였다. 나는 눈감는 인형이 힘들까 봐 앉혀놓고 쳐다만 보다가 밤이 되면 눕혀서 눈을 감겨 재우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친구들은 머리를 땋았다 풀었다 하며 수도 없이 빗질을 해댔다. 옷도 갈아입히고 팔다리를 이리저리 비틀고 인형 몸을 아래위로 흔들어 수도 없이 눈을 감았다 뜨도록 했다. 아이들이 가고 나면 머리가 헝클어진 인형은 혼자의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인형도 나처럼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할 것 같아서였다. 나의 성격과 닮은 듯한 눈감는 인형은 나와 많은 비밀을 공유할 수 있는 좋은 친구였다.
어린 내가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은 것을 걱정했던 엄마는 남보다 한 살 일찍 유치원에 보내기로 했다. 나는 달력에 유치원 입학날을 삐뚤빼뚤 빨간 동그라미를 치고도 부족해 매일 하루하루 손가락을 꼽아 세었다. 입학식이 있기 일주일 전에 나는 어른들이 상상도 하지 못한 결정을 했다. 집안 구석구석을 다니며 내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모두 꺼내어 하나도 남기지 않고 커다란 상자 안에 담았다. "이제 나는 공부를 해야 해. 공부를 끝내고 나서 나중에 장난감을 가지고 놀 거야"라며 모든 장난감을 동네 친구들에게 나누어주라고 내주었다.
어른들은 믿기지 않는 다섯 살 배기의 말과 행동에 가문에 천재라도 난 듯이 놀라며 즐거워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박사를 끝내고 난 어느 날 나는 문득 어릴 적 나의 결정을 후회했다. 어른들은 감동했을지 몰라도 어린 나는 인간이 "성장"하고 다시는 어린이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내린 결정이었다. 공부가 끝나고 나서도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어린이일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후회를 할 때는 이미 나는 눈감는 인형을 갖기에도, 소꿉장난을 하기에도 어울리지 않는 어른이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나는 다섯 살 때 어린이를 굳이 포기하지 않았다.
내 안의 어린이는 지금도 "내가 좋아하는" 장난감들을 산다. 어렸을 적에 동네 친구들에게 건네주었듯이 지금 어른이는 주변 꼬마들에게 건네주며 잃어버린 시절에 대한 억울함을 “승화”시킨다. 가끔은 주기 전에 새로 산 장난감을 책상 위에 펴 놓고 행복을 덤으로 얻는다. 어린이는 악어와 사자와 공룡을, 어른이는 자동차와 비행기와 로봇을 좋아한다. 어른이는 물건을 살 때 어린이가 좋아하는 캐릭터가 담겨있는 것을 선택한다. 우리 집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반기는 카펫에는 어린이 방에 가장 어울릴 우주여행에서 만나는 캐릭터가 그려져 있다. 어린이와 어른이가 함께 즐기는 행복이다.
어린이 덕분에 나는 꼬마들과 쉽게 만화나 우주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그들과 함께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다. 이렇게 나는 가끔가끔 어린이를 꺼내어 충분히 다시 살아본다. 자신 안에 살고 있는 어린이를 무의식의 세계로 집어넣어 묶어두려는 사람들보다 어려서 잃었던 세월을 회복하는 나는 건강한 틴에이저도 경험한다. 그래서 초, 중, 고등학교 또래의 친구들과도 쉽게 그들의 관심주제로 대화할 수 있다. 어른이가 되어서는 대학생들과 ChatGPT며 AI로 인해 변할 그들의 미래와 진로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지금도 다양한 연령대의 친구들을 새로 만나고 그들과 채팅을 한다.
원래 본모습의 나는 엄청 내성적이다. 외향적인 듯이 다양한 연령의 사람들과 심도 있는 수다를 떨 수 있게 된 것은 사실 일찍이 장난감을 버리고 험한 세상을 살아가며 터득한 어른이의 높은 사회성 때문이다. 지구촌을 돌아다니며 만나는 다양한 사람에게 나의 필요함을 알려야 했고, 사회적 기대감을 익혀야 했고, 남의 다양한 처지에 귀를 기울이며 사회성이 자연스럽게 몸에 밴 것이다. 내적 어린이의 표현을 인정하면서도 어른이의 역할을 충분히 학습했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내 안에 공존하는 어린이와 어른이가 조화로운 협력관계로 만들어낸 작품이다.
성인이 마음속에 살고 있는 어린이의 모습을 내보이면 미성숙하다거나 철이 없다고 표현한다. 어린이가 사고의 폭이 좁고 이해력이나 인간관계가 좁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어른이들보다 끝없는 상상력과 명랑함과 이해타산으로 움직이지 않는 순수함이 있다. 어른이가 되어서 이해심도 적고 철이 없다는 것은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어른이의 문제이지 꿈과 희망의 상상력을 가진 어린이를 마음에 품고 있어서가 아니다. 자신 안의 어린이의 장점을 소중하게 인정하고 표현하면 오히려 힘든 어른이의 삶을 풍성하게 하고 폭넓은 사람으로 성숙하게 돕는다.
어른이들이여, 오늘 밤 당신 안에 있는 어린이에게 축복과 사랑의 대화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