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의 꿈이 움트다
매일 보던 교수님이 아닌 키가 자그마하신 여교수님이 강단에 들어섰다. 나의 흥미를 자극할 만한 큰 사건은 아니었기에 별생각 없이 수업에 임했는데 그분은 무척 피곤해 보였다. 왤까? 미국에서 귀국한 지 며칠밖에 되지 않았고 그래서 시차적응이 되지 않아 피곤하고 말이 잘 될지 모르겠다며 미안해하시는데 난 첨으로 "유학?"이란 단어가 머릿속에 반짝이었다. 그 당시에 나에게는 미국친구들이 많아서 미국은 그냥 친구들이 살고 있는 나라라는 생각 외에는 별로 해보지 않았다. 우리나라처럼 대학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그곳에서 공부를 끝내고 오신 교수님을 눈앞에 맞이하니 미국이 공부를 하러 갈 수 있는 곳이구나라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 갑자기 유학을 어떻게 가게 됐고 어떻게 생활했으며 공부는 우리같이 같은 방법인지 등등등 수업과는 관계가 전혀 없는 너무도 많은 질문들이 꼬리를 이었다. 그분은 유명하신 시인 중에 한 분인 유안진교수님이셨다. 나는 그분이 시인인 것보다도 그분이 쓰신 "무릅팍 유치원"이란 책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 무릅팍 유치원은 우리 할머니들이 손자 손녀를 무릎에 앉히고 옛날이야기며 삶의 지혜를 재미있게 풀어가는 유치원에 해당하는 것으로 가장 소중한 교육이라는 것을 강조했는데 우리의 것을 현대의 교육과 비교한 것이 무척 감명 깊었다.
이런저런 질문을 많이 하던 나는 교수님 댁까지 찾아가 질문을 이어갔다. 나는 교수님의 서재에 정리되어 있던 논문집들을 보고 또 한 번 감탄을 하게 되었고 그중 관심 있는 제목의 논문을 몇 권 빌려가지고 왔다. 하지만 교수님은 유학에 대한 질문에는 나의 관심을 충족시킬 수 있는 정도로 성의 있게 답하지 않으셨다. 유학이 흔하지 않던 그 당시 교수님이 만나는 사람들이 많이 유학에 대해 물었을 테고 답을 해도 그리 중요한 내용이 아니라 생각하셨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알아보기 시작했다. 많은 유학정보를 접하기가 어려웠던 때인 만큼 사설 유학원을 통해서 조금씩 알 수 있었다. 유학원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토플이라는 시험을 봐야 한다는 것도 알았고 미국 대학의 이름들도 엄청 많이 들어봤다. 나는 늘 "공부보다는 친구"라는 사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친구, 외로워하는 친구, 대화할 사람이 있어야 하는 친구 등등의 다양한 내용의 상담원처럼 다방을 상담실 삼아 그곳에서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 하루종일 앉아 이야기를 주고받느라 수업을 빼먹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래서 나는 성적이 그리 좋지는 않았었다. 그래도 유학원 사람은 B+ 정도면 원하는 미국대학을 갈 수 있을 거라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외국인에게 요구하는 영어 능력평가인 토플공부를 시작했고 그 외에 GRE (Graduate Record Examinations, https://www.ets.org/gre.html)라는 거의 모든 미국 대학원에서 미국 지원자에게도 요구하는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장애학생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교육을 담당하는 특수교사로 일하는 것이 꿈이었기 때문에 유학에 필요한 시험준비를 좀 덮어두게 되었다. 졸업을 하기 전부터 자원봉사로 드나들기 시작했던 재활원에 교사로 재직을 하게 되었다. 학교일이 너무 재미있어 2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시작했으니 뭔가 더 알고 싶은 것들이 생겼고 나는 그 질문의 답을 찾고자 교사 3년 차에 석사과정을 시작했다. 석사를 마치고 나서야 다시 토플과 GRE시험공부를 시작했다. 같은 학교에 선생님 중에 유학을 계획하는 친구가 있어 함께 격려하며 시험공부를 했다. 토플은 외국인의 영어실력을 테스트하는 것이라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GRE는 영어로 된 질문자체가 뭔지를 모를 정도로 어려웠었다. 그런데 내가 GRE를 치던 때의 틀린 답은 몇 개를 합쳐서 맞은 답에서 감점하는 제도였기 때문에 모르는 문제의 답을 마음대로 찍어 요행을 바랄 수도 없었던 이상한 시험이었다. 나는 지체장애를 전공할 수 있는 특수교육과를 찾았고 그중에 셋을 목표에 두었었다. 그 셋은 남가주 대학 (USC: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미네소타 대학 (University of Minnesota), 버지니아 대학 (University of Virginia)였다. 미네소타와 버지니아 대학은 주립대였지만 USC는 사립이었다.
집을 떠나 혼자 자립해 살던 나는 유학자금이 필요했다. 그래서 여기저기 알아보던 중에 로터리협회에서 특수교육학 전공자를 지원하기 위한 장학금이 있다는 정보를 접하자마자 장학금을 받기 위한 시험준비를 시작했다. 로터리협회에서는 영어와 한국사의 논술형 시험을 보았다. 영어시험은 우연히 시험 보기 며칠 전에 Korea Harold 영자신문에 사설로 실렸던 내용으로 이미 읽어본 터라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한국사 시험은 범위를 정해주지 않아 고대사부터 근대사까지 시간을 쪼개어 공부를 해야 했다. 동료 역사선생님한테 한국사 교재를 빌려서 평생 처음으로 그렇게 우리나라 역사를 심도 있게 공부하기는 처음이었던 것 같다. 뒤돌아 보면 나에게 한국인으로서의 뿌리와 자긍심을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기회가 되었던 사건이었다. 시험은 식민지 사관을 논하라는 질문으로 그 많고 긴 역사적 사건 중에 가장 우리와 가까운 근대사였다. 옆에 앉아 같이 시험을 보던 사람들은 답을 쓸 종이를 몇 장씩 더 얻어가며 엄청 많은 양을 쏟아내고 있었고 그 큰 방에 50여 명이 시험을 보는데 오직 들리는 소리는 연필이 종이 위를 긁고 지나가는 소리만 사각사각 들리고 있었다. 아는 게 많은 것도 아니고 그저 성심성의껏 한 장을 채우기에도 힘겨워하고 있던 나에게는 큰 위협의 우뢰소리로 들렸다. 그래도 늘 긍정의 힘으로 무장한 나는 곧바로 "양보다는 질!"이란 위로의 말로 스스로를 달래며 자신 있게 짧은 한 장 짜리 답지를 제출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필검사가 끝나고 영어로 면접시험이 있었다. 중 3 때 사운드 오브 뮤직 영화를 수십 번을 보고 거기 나오는 음악의 가사를 달달 외웠던 영어실력이 있기 때문에 자신감을 가지고 면접에 임할 수 있었다. 몇 마디 안 했는데 뭐지? 면접관이 나에게 "모든 게 준비됐고 유학을 떠나기만 하면 되는군요"라고 했다. 너무 놀라 "아! 예~"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면접을 마무리했다. 한참 기다림의 시간을 지나 멋있는 로터리클럽이라는 금박 로고가 찍힌 종이에 이러저러해서 이런 정도의 장학금을 주니 축하한다는 글이 도착을 해서 나를 며칠 동안 기쁨에 떨게 했었다. 그래서 유학의 꿈은 나에게 현실로 다가오게 되었다. 유학은 대학 때 만난 유안진 교수님으로 지펴졌던 작은 불씨가 5년이 지나서 드디어 불을 뿜어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교수님은 서울대학교로 옮기셨고 연락이 되지 않았다. 내가 만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분의 시집과 수필집 그리고 내 머릿속의 자그마한 체구의 조용하지만 우리나라의 뿌리와 교육을 연결하시던 강함 힘의 교수님의 모습이다. 아직도 내 손에는 그분 댁에 갔을 때 빌려온 논문 5권이 들려 있었다. 언제라도 만나면 돌려드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