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은 하나를 버리는 것
나는 유학의 선택지로 미국이전에 선호하던 다른 나라가 있었다. 우리와 같은 분단의 아픔을 가진 곳, 라인강의 기억으로 우리가 책에서 배우며 선망의 대상이었던 곳, 검은흙의 나라, 거친 빵을 먹는 나라, 생활력이 강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 괴테를 가진 나라, 바로 독일이었다. 나는 중고등학교 때 사회책에서 배우던 독일을 우리나라와 동일시했었고 고등학교 때 너무도 감명 깊게 읽어 꼭 만나보고 싶은 전혜린 작가가 세세하게 기술을 해 냈던 독일을 직접 경험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고등학교 시절에 독일어를 선택과목으로 들으며 남산에 있던 괴테 인스티튜트라고 불리는 독일 문화원에 독일어를 배웠었다. 독일어의 딱딱한 느낌과 강한 발음이 좋았었다.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받으신 대학원 지도교수님이 내가 유학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고 독일을 강력하게 추천해 주셨다. 유럽에는 학비를 내지 않아서 생활비만 있으면 유학이 가능하기 때문에 돈 걱정을 반으로 줄일 수도 있다며 독일 뿐 아니라 유럽 유학의 장점으로 내세우셨었다.
1981년은 처음으로 UN에서 제정한 세계 장애인의 해였다. 추천과 인터뷰의 우여곡절을 겪으며 대한적십자사의 직원 한 사람과 나는 대한적십자사 대표로 발탁되어 노르웨이 적십자사가 주체하는 "세계 장애인의 해" 기념 콘퍼런스에 참석하게 되었었다.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한참을 흔들리며 혼이 빠진 나를 어떤 공항에 내려주며 쉬어간다는 것이었다. 어디일까? 두리번대다가 공항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앵커리지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한국땅 외에 외국에서는 미국땅을 제일 먼저 밟기는 했었다. 잠시 후 다시 몸을 싣고 흔들리며 내린 곳은 영화에서 보는 외계인이 사는 곳 같아 보였다. 에스컬레이터가 이리저리 공간에 스쳐 지나가고 있던 그곳은 프랑스의 드골공항이었다. 그곳에서는 비행기를 갈아타고 목적지인 노르웨이의 수도인 오슬로에 한국을 출발한 지 거의 하루가 걸려 도착했다. 노르웨이 적십자사의 직원들이 공항으로 나와 환영해 주었다. 세계장애인의 해를 기념하기 위해 전 세계의 적십자 사람들이 모여 장애인 교육과 복지를 향상하기 위한 주제의 다양한 발표를 주고받았다. 나는 우연히 오슬로 시의원인 사람과 친해지게 되었고 그 사람은 나에게 공식스케줄 외의 시간에 오슬로 이곳저곳을 보여주었다. 자신의 집으로도 초대를 해주어 노르웨이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일주일의 일정을 마치고 떠나기 전날 모든 참석자들을 위해 비행기표를 예약하는 시간이 있었다. 주체 측에서 모든 경비를 부담하는 회의라서 그들이 돌아가는 비행기 표를 구매해 주는 것이었다. 나는 다른 나라들의 특수교육도 보고 싶기 때문에 비행기 값을 돈으로 줄 수 있느냐고 묻고 $1400불 정도를 현금으로 받았다. 유럽 전체에 운영하는 철도를 한 달 동안 마음대로 탈 수 있는 Eurail 패스를 구입해 독일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한참을 달렸고 나는 잠이 들었다 깨어 보니 기차가 앞으로 가다가 서고 뒤로 가다 서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가 궁금했는데 한참 후에 내가 타고 있는 칸도 어디론가 들어가는 것이었다. 노르웨이의 오슬로를 떠나 스웨덴의 말로역에 도착한 기차가 덴마크의 코펜하겐으로 가는 페리를 타는 중이었다. 긴 기차가 한 줄로 배에 들어갈 수가 없으니 서너 칸씩 배로 들어가 끊고 뒤로 나와 옆으로 괘도를 변경하여 들어가고 나가기를 하며 옆으로 정렬하여 싣는 중에 내가 탄 기차칸이 페리 속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기차가 배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신기했는데 기차가 배에 다 타고나자 내려서 배의 시설을 사용하거나 바다구경을 해도 된다는 안내방송을 했다. 선실 밖으로 나가니 눈앞에 펼쳐지는 새로운 풍경이 나의 온몸에 스며들었다.
코펜하겐에 내리자 그곳의 상징인 안데르센 동화책 속의 인어공주인 로렐라이가 동화책을 뚫고 나와 바위 위에 앉아 쉬고 있는 듯 보였다. 생각보다는 작지만 아담하고 꽤 정교한 인어공주의 표현이 잘 되어있었다. 나는 꿈에 그리던 독일을 가야 했다. 그래서 "안녕 로렐라이 다음에 다시 만나자" 약속을 남기고 나는 다시 기차에 올랐다. 밤을 지새우고 달려 새벽녘에 독일에 도착을 했다. 진짜로 검은 흙냄새가 나는 듯했고 새벽 기차역 어딘가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따라가니 새벽을 가르고 움직이는 사람들을 위한 조그만 아침식당이었다. 책에서만 읽었던 강한 인상과 땀 흘려 일하는 아주머니가 주문을 받고 음식을 내어주며 말하는 투박한 억양의 독일어가 귀에 들어오자 독일에 도착한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베고 자도 될 정도의 돌덩이 같은 빵조각과 작은 플라스틱 용기에 들어있는 치즈를 사서 용을 써가며 베어 먹으며 재삼 독일임을 확인하고 여기가 내가 공부할 곳이라는 생각에 감격이 차올랐다. 한국에 계신 교수님이 소개한 독일 대학의 교수님을 만나러 함부르크행 기차를 탔다. 거의 400 Km가 떨어져 있는 곳에 도착하여 약속한 시간에 대학교로 독일 교수님을 만나러 갔다. 교수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유학을 하겠다는 생각이 구체적인 각오로 변했고 학교도 마음에 들었다. 다음 해에 입학을 하도록 하겠다고 언질을 하고 다시 본으로 돌아왔다. 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아헨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이미 유학을 하고 있는 중학교 동창과 대학 선배도 만나보며 독일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유학할 대학도 가보고 친구들도 만났으니 그다음부터는 자세한 계획도 없이 유럽을 구경하기로 생각했다. 그냥 기차역을 가서 책에서 봤던 도시의 이름이 눈에 들어오면 그곳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차장밖을 내다보며 오스트리아에서는 사운드 오브 뮤직의 거리를 봤고 알프스 산을 넘는 기차도 타봤다. 기차는 국경의 쉽게 넘나들며 달렸고 하루 이틀을 기차 안에서 자기도 하면서 로마도 가고 피사도 가고 베네치아도 갔다. 바티칸 성당에 가서 미켈란젤로 작품인 예수를 안고 마음 아파하는 마리아상인 피에타며, 베드로 상, 천지창조, 돔을 바치고 있는 아름다운 기둥들을 보며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신다고 하는데 그 답으로 사람도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표현한 최고의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교과서의 내용이 황홀할 정도로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 신기하기까지 하였다. 이탈리아의 제네바에서 페리를 타고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로 갔다. 마드리드도 걸어 다니며 구석구석 구경을 하고 프랑스행 기차를 탔다. 프랑스에서의 며칠 동안에는 에펠탑, 미술책에서만 보던 유명 화가들의 작품들이 실제로 벽에 붙어있어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미술관과 박물관을 다녔다.
영국에는 아는 친구의 형을 만났다. 형님 내외분이 버킹엄 궁전 근위병 교대식과 런던의 여러 곳을 구경시켜 주셨다. 그리고 하룻밤을 그 집에 자게 되었는데 그날 저녁 식사를 끝내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독일 유학을 위해 대학으로 찾아가 교수님도 뵀다는 이야기를 했다. 형수 되는 사람이 나에게 아까 버킹엄 궁전에서 들으니까 영어를 잘하던데 왜 독일로 유학을 가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냥 독일이 좋아서요라고 답을 했는데 돌아오는 그분의 말은 나의 인생을 바꾸게 된 것이었다. 그분은 이렇게 말했다. "독일은 아무리 오래 살아도 네 나라가 되지 않지만 이민자의 나라인 미국으로 가면 그 큰 나라가 네 나라가 될 수 있다"라고 말씀을 하셨다. 미국은 내 나라로 만들 수 있는 나라 다는 단 한마디 말에 반박할 말이 없었던 나는 그날 독일이라는 선택을 버리고 인생의 진로를 바꾸게 되었다. 우리는 살아가며 가끔 그렇게 중요한 순간에 중요한 영향력을 미치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경험한다. 또한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새로운 방향을 선택할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잡고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운 길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꿈속에서 그리던 독일을 버려야 했지만 지금도 가끔 선택을 위해 가지고 있던 것을 과감히 버릴 수 있었던 결정을 잘했다고 하며 스스로 어깨를 두드려주고 있다. 지금도 선명하게 머릿속에서 도는 그 한마디 말에 의해 완전히 바뀐 나의 인생을 그분께 보여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 이후 나는 그 사람을 한 번도 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