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육아방법의 작은 비밀
미네소타에서의 힘든 유학시절을 조금 가볍게 만들어 주신 마리 놀튼(Dr. Marie Knowlton)이라는 교수님이 있었다. 지구 반대편에 홀홀 단신으로 살아가는 나에게 엄마처럼 친구처럼 멘토로서 학문적 가르침보다도 인생의 지혜를 가르쳐주신 망년지우(忘年之友)이다. 마리교수님의 연구실이 조교연구실 옆이라 내 교수님보다도 거의 그 방에 가서 시간을 보냈다. 영어를 잘하는 것은 단어와 문장과 발음의 문제라기보다는 얼마나 그 문화를 잘 아느냐에 달려있는데 당연히 내가 미국아이들하고 편안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이유는 마리교수님과 매일 온갖 내용의 수다를 떨었기 때문이다. 서로 농담도 많이 하고 미국속담 속에 들은 이야기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그분도 내가 가지고 있는 한복을 입고 대갓댁 마님 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기도 했고 김을 좋아해 내가 그 댁으로 놀러 가면 직접 기름 발라 구운 김을 식사에 내기도 해서 서로의 문화를 배우고 존중하는 시간들이 나에게 미국이라는 나라에 깊이 적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마리는 헝가리와 독일계의 후손으로 감자와 빵등 탄수화물 종류로 아침을 거하게 먹는다며 다른 미국인보다는 훨씬 풍성한 식탁으로 날 맞이해 주셨다. 또한 헝가리 외할머니에게 배운 음식을 만들기도 했는데 헝가리 음식이 한국음식의 닭볶음탕과 비슷한 것도 있었다. 또 헝가리의 신화에 헝가리 사람들은 동방의 Hun (칭기즈칸을 일컬음)이 은하수를 타고 내려와 그들을 구원한다는 옛이야기로 위안 삼아 힘든 세상을 참고 기다리며 살아간다는 이야기도 해주었다. 나는 "어? 몽고? 나도 몽고인의 피가 있는데"하며 그 후부터는 마리교수님이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칸"의 피를 조금 나누어 받은 내가 은하수를 타고 달려와 도와줄 테니 걱정 마시라고 농담을 했다. 또 미국속담 중에 크리스마스 날이 되기 전에 선물을 열면 선물이 톱밥으로 변하기 때문에 절대로 미리 열면 안 된다고 알려주셨다. 한번 나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여러 개의 선물을 준비해 가지고 가서 교수님께 열어보라고 했다. 첫 번째로 건네어드린 것을 열고 교수님은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그 안에는 종이접시가 들어있어 뭔가 바닥에 떨어트렸나 확인을 하셨다. 나는 "분명히 금접시를 넣었는데... 크리스마스 전에 열어서 진짜 변해버렸네요"하고 서로 한참을 웃었다.
여름이 되면 교수님은 대학이 있는 미네아 폴리스에서 북쪽으로 5-6시간 떨어진 버미지(Bemidji) 분교로 강의를 가셨다. 그곳은 세계에서 4번째로 긴 미시시피 강의 발원지가 있다. 어느 날 미리 연락도 하지 않은 채 열공 중인 교수님과 학생들을 위해 손수 솜씨를 낸 한국갈비와 밥과 김치를 넉넉히 싸들고 위문차 깜짝 나타나기도 했다. 동네 공원에 가서 고기를 굽는데 비가 내렸다. 비를 맞으면서도 교수님은 싱글벙글 "소고기는 찔러서 음메~ 하는 소리만 나지 않으면 먹을 수 있다"며 채 익지도 않은 고기를 들고 맛있게 드셨다. 미국학생들에게 대한민국의 음식과 문화를 나누고 떠드는 동안 교수님은 "오늘 네가 와줘서 너무 좋다"라고 속삭이셨다. 식사 후 미시시피강의 발원지를 보여주시겠다며 함께 갔다. 그렇게 길고 폭이 넓은 미시시피 강도 발원지 근처는 폭이 20m 정도에 얕아서 방문객들은 다 바지를 걷어붙이고 강을 건너는 세리모니를 하는데 그렇게 해야 진정한 미네소타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물가에 앉아 같이 건너자고 다가오는 교수님께 손으로 강물을 뿌렸다. "아니 동방예의지국의 학생이라며 교수한테??" "그래서 이렇게 두 손으로 공손하게 뿌리는데요!" 깔깔대며 미시시피 강을 걸어 건너서 그 아름다운 여름날에 나는 그날 진짜 미네소타 사람이 되었다.
많은 시간을 대화하며 혼자 사시는 노 여교수님의 삶도 듣는 기회가 있었다. 남편 뒷바라지만 하며 1남 2녀를 키웠는데 어느 날 남편이 젊은 부인을 찾아 떠났고 혼자 아이 셋을 키웠다고 한다. 막막해져 살 길을 찾다가 대학원을 가서 공부를 하고 50대가 되어서야 우리 대학이 첫 취업이었다고 했다. 총명했던 큰 딸은 아버지 일로 충격을 받아 공부와 멀어졌고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집을 떠나 1주일 만에 결혼을 했다고 한다.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들어왔고 그 남자를 보는 순간 성령이 그와 결혼을 하라고 해서 엄마에게 알릴 틈도 없이 다급하게 결혼을 하고 나중에서야 남편이라고 소개하는 바람에 너무 놀랐다고 했다. 남편은 미국본토 인디언으로 출옥을 한지 얼마 안 된 사람이었고 큰 딸과 5년간의 결혼생활 중에 3년을 또 복역하여 옥바라지 시간이 더 길었다고 했다. 아들이 하나 있는데 마리교수님은 그 손자를 참 예뻐했다. 멀리 타주에 살아 자주 보지 못하지만 그 아이가 올 때마다 함께 카누(Canoe)를 만들고 있다며 차고에 아직 뼈대만 있는 카누의 사연을 말해주었다.
큰 딸은 옥살이하는 신랑을 대신해 홀로 아이를 키우며 사회보장금으로 겨우 살아가고 있었고 둘째 아들은 히피족으로 머리를 치렁치렁하게 기르고 자유분방하게 공부를 하다 말다 하고 직장에도 별 관심이 없어 사회보장금을 받는다고 했다. 셋째 딸은 무엇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고 뉴욕에서 동성애자로 다른 여성과 살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답답하고 실망스러운 자식들의 사정을 너무도 덤덤히 남의 이야기하듯이 말하는 교수님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미국에서는 자녀들은 18세가 되면 집을 떠나고 부모는 성인이 된 자녀가 스스로 원하는 삶을 살도록 한다는 말을 이렇게 실천하는 것일까? 한국적 사고로 생각할 때 마리교수님의 자식들 이야기가 "존중"보다는 "방치"같아 보이는 이 상황이 진짜 미국문화일까 하고 너무 놀랍기만 했다. 조용히 듣고 나서 나는 조심스럽게 미국사람들은 진짜로 어려운 상황에 있는 자식의 일이 남의 일인 것처럼 마음에 전혀 동요가 없냐고 물었다. 교수님의 대답이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당연히 힘들게 살고 방황하는 아이들 때문에 마음이 많이 아프지만 "어렸을 때 내가 잘 가르쳤기 때문에 현재는 방황을 해도 언젠가 돌아올 것이다." 나는 그 엄마의 믿음이 너무도 놀라웠다. 내가 10여 년 후 미네소타를 방문했을 때 나는 그의 믿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큰 딸 마샤는 남편이 결혼 후 세 번의 옥살이를 하고 나와서도 또다시 감옥으로 가게 되자 이혼을 했다. 아들의 이름도 인디언 고유의 이름에서 미국식 남자아이의 이름으로 바꾸고 자기 엄마처럼 학교로 돌아갔다. 대학원에서 새로운 사람과 결혼을 했고 그는 나에게 "내가 없을 때 우리 엄마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라고 했다. 그 후 그는 박사과정을 끝내고 교수가 되었다. 서당총각 둘째 아들도 머리를 자르고 결혼을 하고 지금은 교수로 일하고 있다. 셋째 딸은 여자 파트너와 아이를 입양해 행복하게 살고 있다. 나는 마리교수님의 믿음이 옳기는 하지만 아직도 아슬아슬한 스릴이 느껴진다. 과연 어떤 부모가 그러한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 잘될 거라고 자식을 믿는 믿음보다도 그들이 어렸을 때 "잘 가르쳤다"는 자신에 대한 믿음이 놀라운 것이다. 종교인 부모를 둔 아동은 사회성 발달과 긍정적 자아개념의 발달하도록 자녀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나는 종교인으로서 자녀에게 가는 교육적 영향 외에도 종교적 믿음이 부모 자신에게 주는 자신감을 지적하고 싶다. 믿음에 근거한 자신감 때문에 이스라엘 부모들이 유아교육에 강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꼭 기독교가 아니더라고 부모에게 지혜를 주고 지켜주는 절대자가 있다는 믿음이 육아와 자녀교육에 매우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