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하는 아지매
내가 글을 썼던 이유
내가 글을 썼던 것은 내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기 위함이었어요. 딱히 탁월하게 잘하는 것이 없으니 주저리주저리 글을 써서 나 여기 있어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어요.
글쓰기의 시작은 초등학교 3학년 때 일기 쓰기가 시작이었어요. 일기를 잘 썼다고 상을 받은 것이 더욱 열심히 쓰게 했고요.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반복해서 썼는데 하루도 빠지지 않고 쓰니 그 성실함이 기특해서 상을 주었던 것 같아요.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와 스스로 돈 벌어먹고살고 공부하며 외롭고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시간을 일기장에 풀어냈는데 이 또한 있었던 일을 그대로 나열하고 감정이나 느낌을 쏟아내며 마음을 정화하는 시간이 되었어요. 일기가 복잡한 감정을 덜어내는 시간이었다면 편지는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고 살아갈 에너지를 주는 충전기 같은 것이었어요.
중학교 때 딱 하루 결근하신 수학 선생님을 대신해서 수학을 가르쳐주셨던 문용호 선생님은 수학이 아닌 삶의 방향을 알려주셨고 중학교를 졸업하고도 저의 손을 놓지 않고 멘토로 함께 해주셨어요. 문용호 선생님과 함께 편지를 대필해주다 인연이 된 오래전 고인이 되신 고인석 작가님의 ‘네 삶이 수필이야 네 삶을 글로 써봐’ ‘너는 괜찮은 아이야. 잘할 수 있어’하신 말씀이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쓰게 했고 잘하는 줄 알았어요.
글쓰기를 공부하며 제가 맛깔나게 글을 쓰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진솔한 글쓰기로 승부수를 던지고 통찰이 턱없이 부족한데 겨자씨 같이 작은 통찰을 대단한 것으로 포장하려고 했어요. 그래서 종이 책 두 권과 전자책 한 권을 출간하며 인정받고 싶어 했어요. 한 사람의 독자를 위해 글을 쓴다고 하면서도 인세가 들어오기를 바랐어요. 들어오는 인세는 쥐꼬리만큼도 안되어 어떻게 독자의 니즈를 파악해 글을 써야 나를 먹여 살릴 만큼의 인세를 받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이러저러한 시도를 했어요.
북클럽을 운영하며 후기를 통해 제가 얼마나 생각이 짧은지 절실하게 느꼈어요. 7-8년을 서평단으로 활동했는데 그때의 집중력은 사라지고 없어요. 그때 쓴 서평을 보면 제가 쓴 것 같지 않아요. 어디에서 그런 단어가 나왔고 통찰이 나왔는지 신기해요. 그때는 그랬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무엇인가로 먹고살기 위해서는 그 분야에 탁월함이 있어야 하는데 저는 글쓰기를 좋아는 했지만 탁월하지는 않다는 것을 이제야 인정해요
매일 새벽 153개의 말씀에 기대어 글을 썼어요. 그때는 50년 이상 신앙생활하며 듣고 읽고 생각하고 기도하며 깨달은 것이 있으니 그나마 쉬웠는데 이어서 《인생독본》의 한 줄 글에 기대어 글을 쓰려니 억지스럽기 짝이 없었어요. 내가 왜 이렇게 질질 끌며 글을 쓰고 있지? 이렇게 한다고 글 쓰는 실력이 느는 것도 아닌데 뭘 바라는 거야? 여전히 어휘력은 턱없이 부족하고 은유는 당초에 없는데 뭘 가지고 다른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주고 울림을 줄 수 있다고 글을 쓴다는 거야?
제가 글을 썼던 이유는 저의 존재를 드러내고 저를 먹여 살리고 싶어서였어요. 그런데 탁월하지 않은 글쓰기는 저를 먹여 살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동안 집착했던 글쓰기를 내려놓고 정년 후 저를 먹여 살릴 저의 탁월함을 찾으려고 해요. 아직은 모르겠어요. 성실함, 끈기 뭐 이런 단어가 떠오르기는 하나 그것이 탁월함과 연결되지는 않아요. 제 안에 있는 남과 다른 탁월함은 무엇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