튤립
알쓸신잡에서 작가 김영하는 ‘왜 우리는 특별한 날에 꽃을 선물할까요?’ 라는 유희열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꽃 한 송이가 핀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식물이 꽃을 피운다는 것은 온 힘을 다해야 하죠. 물도 충분해야 되고, 여러 가지 상황이 잘 맞아서 진짜 온 힘을 다해서 쫙 피워 내는 거예요. 식물의 운명이 걸려있죠. 아름다워야 하고 벌이 날아와야 하니까요. 그런 걸 생각해보면 졸업식이나 이럴 때 축하하면서 꽃을 주는 것은 네가 그동안 여기 도달하기까지 겪은 수고, 고통.. 힘듦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다는 게 아닐까."
아라이 마키가 그린 그림책 시리즈를 읽으며 김영하 작가의 말을 떠올려보면 한 송이 꽃을 피우는 것이 정말 쉬운 일이 아니구나 새삼 깨닫게 된다. 일본의 세밀화 작가인 아라이 마키 작가의 그림책 중 국내에 소개된 그림책은 나팔꽃, 해바라기, 민들레, 튤립, 딸기 등이 있다. 눈을 확 사로잡는 아름다운 그림과 지루하지 않은 글로 식물의 한살이를 소개하고 있어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해마다 봄이 되면 꽃집에서는 예쁜 봄꽃들을 가득 내어놓고 오고 가는 사람들의 눈길과 발길을 잡는다. 무채색의 겨울에서 색색의 빛깔로 물드는 봄의 매혹에 빠진 사람은 누구나 꽃 하나를 사 들고 가 집안에 봄을 들이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될 것이다. 나 역시 봄만 되면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귀여운 꽃망울의 튤립을 사와 꽃이 질 때까지 그 빛깔과 모양을 기쁘게 감상하고 즐겼다. 하지만 꽃이 지고 잎이 시들어가면 뿌리째 뽑아 버렸다. 알뿌리를 잘 키워 다음 해에 심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니 나는 꽃이 아닌 튤립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이 책은 작은 알뿌리에서 시작한다. 알뿌리는 땅속 깊은 곳에서 오랜 시간을 기다린다. 시간이 쌓이면 알뿌리는 넓고 깊게 뿌리를 뻗어 나간다.
'와, 땅속에 잔뿌리를 이렇게 많이, 깊게 뻗고 있구나.'
죽어버린 식물을 뽑을 때 좁은 화분 가득 차 있던 뿌리를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었다. 동그란 알뿌리에서 이렇게나 뿌리를 뻗고 있었다는 게 우리가 모르는 튤립의 애씀과 노력 같아서 뭉클했다.
처음엔 양쪽 페이지 가득 만개한 형형색색의 튤립꽃 그림에 눈길이 먼저 닿는다. 하지만 계속 읽다 보면 꽃 아래 우리가 보지 못하는 알뿌리에 자꾸만 마음이 내려앉는다. 이 책이 이렇게 만개한 튤립꽃에서 끝나지 않는 것이 참 좋다. 튤립이 알뿌리에서 꽃을 펼쳐내기까지, 그리고 꽃이 지고 난 후 우리가 미처 돌아보지 못했던 그 남은 시간들을 다시 돌아가 살펴보는 게 참 좋다. 꽃들의 일이란 꽃이 지고 난 이후가 더 치열하고 더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튤립의 꽃이 지고 난 이후에도 잎은 계속 영양분을 모으고, 그 영양분을 새로 자란 새끼 알뿌리로 보낸다.
처음에 심었던 알뿌리는 영양분을 다 쓰고 시들어 껍질만 남아요.
글을 읽으며 그림에서 원래의 알뿌리를 찾아보았다. 싱싱하게 영글어 가고 있는 어린 알뿌리들 사이에 말라비틀어진 껍질이 된 원래의 알뿌리를 찾아 가만히 만져보았다. '애썼구나, 너. 참 애썼구나.' 절로 칭찬하고 싶어졌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꽃을 피우기 위해 애쓰고 애쓰는 하나의 알뿌리일지도 모르겠다. 언제 싹이 틀 수 있을지, 무슨 꽃으로 피어날 지 알지 못하는 불확실성을 견디면서 말이다. 그렇게 기다리다 피워낸 꽃이 어쩌면 내 마음에 들지 않는 혹은 전혀 바라지 않았던 모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면 좀 어때? 그래도 기어이 꽃을 피워냈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닐까? 기다림을 견디고 꽃을 피워내기 모든 애를 쏟고, 새로운 알뿌리까지 만들고 난 뒤 말라서 사라지는 알뿌리는 어떤 꽃을 피워내든 이미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하다.
그러니 나의 애씀과 노력을 내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내가 격려해주었으면 좋겠다.
애쓰고 있구나, 너.
잘 하고 있구나,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