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종! 쌓기의 달인
'공든 탑이 무너지랴’라는 속담이 있다. 공들여 쌓은 탑이 무너질 리가 없다는 말로 성실하게 최선을 다한 일은 반드시 좋은 결과를 얻게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어떤 일의 결과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 "공든 탑이 무너질까, 걱정하지 마." 라며 위로와 응원을 건네며 쓰던가, ”공든 탑이 무너질리가 있겠어.”라며 결과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 기대와 믿음을 다지며 쓰는 경우가 많다.
탑은 여러 층으로 쌓아 올려져 있어야 탑이라고 불린다. 무너져 버린 건 탑이 아니다. 그저 돌무더기이다. 그러므로 탑이 무너진다는 것은 곧 실패를 의미한다. 공들여 쌓은 탑이 무너지지 않고 튼튼하게 잘 버티고 있으면 좋으련만, 현실에서 우리는 꽤 오래 정성과 시간을 들이며 쌓아 올린 일이 자주 무너지는 경험을 한다. 무너질 리가 없다며 확신하여 강조하는 것은 어쩌면 공든 탑이 무너져버릴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열심히 노력하고 애썼는데, 그 결과가 실패 혹은 도저히 만족할 수 없을 만큼 허망하게 끝나버리는 것은 누구나 쉽게 받아들이기가 어려우니까 말이다.
여기 매일 매일 탑을 쌓는 사람들(아이들)이 있다. 비둘기 기자는 이 두 아이를 인터뷰한다.
”매일 매일 탑을 쌓는다고 들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이 질문에 아이들이 대답한다.
”좋아하니까요.“
쓰러지지 않게 균형을 맞추어서 힘들게 하나하나 탑을 쌓아 올리는 이유가 그저 좋아서라니, 누군가 머리를 한 대 쿵 치는 것 같다.
'당신은 지금 그림을 그리고 싶다.'
어느 화실 앞에 붙여진 글이었다. "문구가 참 재미있구나." 생각하며 지나쳤는데, 마치 세뇌라도 당한 듯 그 뒤에 자주 그 글이 떠올랐고, 정말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다. 살면서 그림 잘 그린다는 소리를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었던 내가, 주부가 취미로 배우기엔 조금 비싼 것 같아 부담스러운 수업료를 내고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첫 시간엔 1시간 내내 선만 긋다가 왔는데도 재미있었다. 선생님이 예시로 그려준 그림을 얼기설기 따라 그리다 처음으로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스케치하고 색을 입혀 그리던 날엔 마치 화가라도 된 양 자랑스럽고 뿌듯했다. 밥을 먹다가, 길을 가다가다 재미있는 장면이 보이면 사진을 찍어두고 '이 장면은 어떻게 그려야 될까?, '어떻게 색을 칠해야 할까?' 골똘히 생각했다. 머릿속에 온통 그림 생각뿐이었고, 매일 그리고 싶어 안달이 났다. 초등학생이 그린 것처럼 어설퍼 보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또 제법 잘 그린 것처럼 보이는 그림을 그리다가 화실 사람들과 전시회도 해보았다. 새로 찾은 삶처럼 행복하기만 했었다.
그러다 우연히 그림책 창작 워크샵에 참여하게 됐다. 이야기를 만들고 그림을 직접 그려 한권의 책을 만들어보는 것이었는데, 매일 밤을 세워 그림을 그려도 피곤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림을 그리고 더미북을 완성하고 나니 욕심이 생겼다. 출판사에 투고를 하고 공모전에 응모도 해 봤지만 결과는 신통찮았다. '그림이 부족하다', '그림을 보완했으면 좋겠다', '그림이 아쉽다.'라는 피드백을 제일 많이 받았다. 처음에는 그런 피드백을 받는 것 만해도 기뼜는데, 그 뒤 그림을 그리는 게 점점 어려워졌다. 머릿속에는 이미지가 있는데 손으로 표현이 되지 않았다. 재능이 없는 그림은 이렇구나, 자신감이 떨어졌다. '나는 그림을 잘 못 그리잖아,어무리 애써도 나는 내가 원하는 그림을 그리지 못할 거야.' 이런 생각이 커지자 붓을 잡는 일이 두려워졌다. 부족한 손그림 실력을 보완하기 위해 디지털 드로잉을 시작했지만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림은 내가 할 수 없는 영역인 것만 같았다. 결국 나는 그림을 거의 그리지 않게 됐다.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 신나서 했던 일이 어떻게 이렇게 됐을까? 그저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 열심히 탑을 쌓는 아이들이 부럽기만 했다.
아이들이 온갖 것들로 쌓아올린 거대한 탑은 구름을 뚫고 하늘 높이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계속해서 탑을 쌓는 이유를 알려달라는 비둘기 기자의 말에 아이가 이렇게 대답한다.
”무너뜨리려구요.“
그리고 툭 건드려 그동안 힘들게 쌓아올린 탑을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뜨려버린다. 쏟아져내리는 탑들 아래에서 깜짝 놀란 비둘기의 표정과 달리 아이들의 표정은 밝고 헤맑기만 하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오며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아, 무너뜨려도 되는거구나. 그래도 괜찮은거구나.'
눈물이 찔끔 나려 한다. 실패하지 않으려고 잘하고 싶어서 아등바등 거리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가끔은 그냥 무너뜨리고 새롭게 시작해도 될 것을, 그렇게 세우고 무너지고 세우고 무너지는 과정속에서 내 세계가 더 확장될 수도 있는데, 탑을 잘 쌓는 법을 알게 될 수도 있는데, 어떤 모양으로 탑을 쌓아야 하는지 알 수도 있는데, 실패하지 않으려 애쓰다 보니 얼설프게 쌓아 놓은 탑을 붙들고 안절부절하기만 했었다.
무너뜨려도 된다고 생각하니 다시 쌓는 게 두렵지 않다. 하다가 안되면 그만둬 버리지 뭐. 실패하지 않으려는 마음에 어설프게 쌓아올린 탑을 붙들고 안절부절하기만 했다. 그동안 그렸던 그림에 미련 갖지 말고 오늘은 그냥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려봐야겠다. 처음에 좋아서 했던 그 마음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