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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꿈 Nov 10. 2020

아버지에게 띄우는 이야기

가드를 올리고

아이들을 보내고 집안일에 정신없다 휴대폰을 보니 새로운 톡이 있습니다. 어디 산을 오르고 계시는지 숲 속 풍경을 찍은 사진과 ‘여보 힘드네요.’라는 아버지의 글이었습니다. 엄마에게 보내려던 톡을 가족 단톡방에 올리신 모양입니다. 그냥 넘기려다 쌀쌀해진 날씨와 초점이 흔들린 사진, 힘들다는 말이 신경이 쓰여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아버지, 산에 가셨어요?”
“어, 너한테 톡을 보내었더냐? 엄마한테 보낸다는 게 너한테 보냈나 보네.”
안 힘드세요?”
“오랜만에 올라오니 힘드네.”
“아빠 산에 자주 안 가셨어요?”
“전에는 그랬는데 한 1년 만에 오는 거 같다. 배가 자꾸 나와서. 엄마가 오늘 산에 가고 인증사진 올리라고 하네.”
한동안 여러 산을 열심히 다니시기에 지금도 그런 줄 알았는데, 산에 안 가신 지 1년쯤 되었다는 건 몰랐습니다. 이것뿐일까요? 내가 아버지에 대해 모르는 것이.

어릴 때는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애교를 부릴 줄 아는 제법 사랑스러운 딸이었는데 10대의 저는 아버지를 많이 미워했습니다. 젊은 아버지는 아무도 대항하지 못할 권력을 지닌 독재자였습니다. 아버지가 화를 폭발할 때마다 무서워 숨죽이며 아버지에게서 벗어나 자유를 누릴 날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런 날들이 많아질수록 아버지와 나 사이의 벽은 두꺼워졌고, 는 점점 말문을 닫았습니다.  
20대의 저는 아버지의 고리타분하고 낡은 생각들이 내 인생을 흔들 때마다 대들고, 싸우고, 저항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나를 단단히 지켜내고 싶었습니다. ‘너희들이 크니, 이제 아버지가 점점 힘드네.’라는 말로 늙은 독재자는 권위의 상실과 힘의 약화를 인정했고, 저는 전쟁에서 승리한 투사처럼 의기양양하고 잘난 체했습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서야 아버지가 쉽게 꺼내 보이지 못했던 삶의 무게, 막막함, 외로움, 슬픔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자주 연락을 하거나 살갑게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무심한 딸입니다.

[가드를 올리고] / 고정순 글 , 그림 /  만만한책방 / 2017. 11. 27

여기 한 남자가 있습니다. 자신만만하게 링 위에 올랐지만, 상대는 예상 밖으로 강합니다. 쉴 새 없이 빈틈을 노리고 들어오는 주먹에 정신은 아득해지고,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고 버텨보지만, 결국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고 맙니다. 이대로 포기하나 싶을 때 퉁퉁 부은 얼굴로 남자는 다시 일어섭니다. 가드를 올리고.
재미있게도 이 책의 글은 그림과 달리 산을 오르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림과 텍스트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집니다. 저는 그림과 글을 함께 보며 마치 우리네 인생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마치 아버지 같았습니다.  

아버지는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큰누나의 집에서 일을 거들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6학년인 내 큰 아이와 비슷한 나이지요. 여전히 솜털이 보송보송한, 엄마 품에 파고들며 어리광을 부리고 싶을 나이의 어린 아버지는 낯선 곳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살기 위해 악을 썼습니다.
링 위의 남자도 혼자입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경기에 홀로 나서 그는 어쩐지 조금 외로워 보입니다. 피하지도 않고 요령도 없이 맞고 맞받아치는 모습은 잔꾀 부릴 줄 모르고 성실하기만 했던 아버지 같습니다. 여기저기 두들겨 맞아 상처투성이가 된 얼굴로도 주저앉을 수 없어 다시 일어서는 남자는 가장이라는 책임감으로 똘똘 뭉쳐 있던 아버지의 인생 같았습니다.
아버지도 무서웠겠죠. 아버지도 외로웠겠죠. 아버지도 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을 때가 있었겠죠. 어리고 젊었던 나는 그때의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의 인생을 짐작하고, 아버지를 이해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겨우 아버지에게 감사하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인생을 거름으로 내가 자랄 수 있었습니다.

단톡방에는 다른 가족들이 아버지를 걱정하고 응원해주는 톡들이 올라왔습니다.
“여기는 별로 춥지 않아. 모두들 걱정해줘서 고마워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라.”
아버지의 마지막 톡을 한참 바라보았습니다.
돈 걱정에 어깨가 무거웠던 남자, 책임감이 강했던 남자, 자식들과 가까워지고 싶었지만 방법을 몰랐던 남자, 가족들의 사랑이 떠날까 더 고집스럽게 굴었던 남자. 외로웠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던 그 남자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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