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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꿈 Nov 13. 2020

소박해서 충만한 삶

달구지를 끌고

[달구지를 끌고]   | 도널드 홀 글 / 바바라쿠니 그림 /  비룡소 / 1997. 11. 10

이 책의 첫 장면은 낙엽이 떨어지는 시골의 어느 집 앞에서 한 신사가 갈색 얼룩무늬가 있는 소를 달구지에 매는 장면과 이런 글로 시작됩니다.      

10월 되자, 농부는 소를 달구지에 매었어.
일 년 내내 가족 모두가 기르고 만든 것 가운데서
남겨 둔 것들을 달구지에 가득 실었지.  

1년 내내 농부의 가족 모두가 기르고 만든 것들은 이런 것들입니다. 농부가 깎은 양털로 실을 만들어 아내가 짠 숄과 딸이 짠 벙어리장갑 다섯 켤레, 겨울 동안 가족 모두가 만든 양초와, 아마 섬유로 짠 리넨 천, 농부가 직접 쪼갠 널빤지와 아들이 칼로 만든 자작나무 빗자루, 식구들이 먹을 것과 씨앗으로 쓸 것은 빼고 남은 감자와 사과 한 통, 꿀과 벌집, 순무와 양배추, 단풍나무 수액을 끓여 만든 설탕, 뒷마당 거위들이 떨어뜨린 것을 아이들이 주워 모아둔 거위 깃털 한 자루.      

농부가 달구지에 싣고 간 것들은 보기 힘든 신기한 물건도, 화려한 것도 아닙니다. 값비싼 재료들로 만든 귀중품도 아닙니다. 삶에서 얻은 소박한 것들이지만 이 안에는 가족들의 수고스러움이 담겨 있습니다. 많이 얻겠다고 계절을 거슬러 억지를 부리지도 않습니다. 동물과 자연을 괴롭지도 않습니다. 노동이 삶의 충만함을 침식하여 고통스럽지도 않습니다. 자연이, 계절이 그때그때 내어주는 것을 딱 필요한 만큼만 받고 구합니다. 그래서 이 가족의 노동에는 경건함마저 느껴집니다.      


농부는 달구지에 실어 온 것들을 다 팔고, 설탕을 담아간 나무 상자도, 사과를 담아 간 통도, 심지어 달구지도 팝니다. 소와 멍에, 고삐도 모두 팝니다. 지금 당장 필요하지 않은 모든 것들을 미련 없이 팔아버립니다. 다음에 또 쓰일 테니까, 혹시 모르니까, 더 많이 쟁여두고, 더 많이 가지고 있어야 마음이 편안해지는 저는 농부가 이해되지 않습니다. 미련하고 바보스러워 보이기도 합니다.      


주머니가 두둑해진 농부는 시장을 돌아다니다 무쇠 솥 하나, 딸에게 줄 수예 바늘 하나, 아들에게 줄 주머니칼 하나, 가족 모두를 위한 앵두 맛 박하사탕을 사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렇게 두둑해진 주머니로 농부가 산 것들은 다음 가을 다시 이 시장에 와서 물건을 팔기 위해 필요한 것들, 딱 그 정도입니다. 남은 돈으로는 뭘 할까요? 농부에게 돈은 어떤 의미일까요?     


농부는 집으로 돌아오고, 늦은 저녁 가족은 벽난로 앞에 모입니다. 아내는 새로 사 온 무쇠솥으로 음식을 만들고, 딸은 수예 바늘로 수를 놓습니다. 아들은 주머니칼을 들고 있네요.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지켜보는 아버지의 표정은 만족스럽고 행복해 보입니다. 이 가족의 모습은 더없이 충만해 보입니다.      


가끔 집안에 물건이 너무 많아 답답하고, 모두 다 버려야겠다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내 또 다른 어떤 것이 갖고 싶어 인터넷을 검색하고 장바구니에 담아 둡니다. 소박하고 현명하게 가지고 버리는 농부의 삶이 제게는 제일 어려워 보입니다. 미련한 건 농부가 아니라 꾸역꾸역 자꾸만 짐을 채워 넣는 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제게 힐링이 됩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많이 가지는 만큼 늘어나는 게 아니라는 걸 알려주니까요.     


오늘은 엉덩이를 들고일어나 창고정리를 좀 해야겠습니다.  아까 얼핏 봤더니, 어릴 때 썼던 육아용품도 보입니다. ‘나중에 버리자’, ‘나중에 필요한 누군가가 있을 거야’ 하며 넣어뒀던 걸 여태 치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미련하게 끌어안아 짐을 만들지 말고 미련 없이 버리며 가벼워져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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