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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cent G Jun 27. 2021

3관: CERULEAN BLUE (2)

한국에서만 교육받은 사람이 유학생활했던 분에게 물어보다.

3관 ‘한국에서만 교육받은 사람이 유학생활했던 분에게 물어보다.’     


(G교사)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인사드리네요. 오늘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천천히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선생님의 초·중·고등학교 시절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L교사)  반갑습니다. 저는 초등학교를 한국에서도 다니고 뉴질랜드에서도 다녔어요. 초등학교 2학년 말까지 뉴질랜드에서 다니다가, 한국으로 와서 졸업을 하게 되었어요. 여느 초등학생과 비슷하게 많이 뛰어놀았던 기억이 납니다. 뉴질랜드 학교는 운동장이 잔디로 되어 있어서 더 신나게 놀았어요. 보통 한국에서는 조회하는 경우도 운동장 흙 위에서 하잖아요? 뉴질랜드에서는 정형화되어 있지 않아서 잔디에 앉아서 조회를 했었습니다.

     

(G)  벌써 몇 년 전임에도 불구하고 큰 차이가 있네요. 아직 초등학교에 잔디가 없는 경우도 많은데요. 그럼 한 반에 학생 수는 몇 명 정도였나요?     


(L)  10명에서 20명 사이였어요. 엄청 작은 학교는 아니었어요. 드문드문 생각나기로는 그러네요. 그리고 뉴질랜드에서는 Lunch Box(점심 도시락)를 준비해서 학교에 갔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건물도 1층(단층)으로 되어있었고, 학교에 수영장도 있어서 정규 교육과정에 수영도 있어서 배울 수 있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방과 후 학교’라는 개념도 있었어요. 그리고 한국에 와서는 아파트에 살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았는데, 어찌하다 보니 적응이 되더라고요.         


(사진 3개, 뉴질랜드 초등학교 전경, 제공: L교사)     



(G)  초등학생 때를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요? 저 같은 경우는 밖에서 매일 뛰어놀고 자전거 타고 여기저기 쏘다니는 학생이었다고 스스로 생각하거든요.     


(L)  저는 초·중·고 시절 모두 흔히 말하는 범생(모범생)이 스타일이었어요. 선생님이 통지표 써 줄 때 써줄 내용이 많았던 느낌이에요.      


(G)  학창 시절에 학급 임원을 했던 적이 있나요?   

  

(L)  네, 몇 번 했었어요. 초등학교 때만 했었고 중학교 이후는 안 했던 것 같아요. 제가 하고 싶어서 또는 리더십이 뛰어나서 한 건 아니고, 주변에서 추천을 해줘서 했었습니다. 나서서 하고 싶지는 않은데 추천을 받아서 한 기억이 납니다.      


(G)  그래도 다른 친구들 시선에서 어느 정도 믿음직하니까 추천을 하지 않았을까요? 아무리 학생이어도 어느 정도 안목들은 있을 것 같은데요?     


(L)  그렇죠. 다른 친구들이 보기에 착한 친구라는 인식이 있었던 것 같아요. 선생님한테 칭찬도 많이 받았었고요.     


(G)  학생 시절에 학원은 많이 다녔었나요?     


(L)  영어학원을 다녔었어요. 영어 회화를 원어민과 배우는 학원 하나만 다녔고, 문제집은 집에서 스스로 푸는 정도였어요. 아! 태권도 학원도 좀 다녔었어요.     


(G)  공부를 엄청 강조하는 가정환경은 아니었네요?     


(L)  그런 환경은 아니었죠. 제가 누나가 있는데, 누나를 보면서 조금 눈치껏 행동했던 것 같습니다. 누나가 이런저런 것 때문에 혼나는 것을 어깨너머로 본 거죠. 부모님이 말씀하시길, 나름 알아서 스스로 했다고 하시곤 하셨어요.      


(G)  원래 첫째가 약간 희생양이 되는 것 같아요. 제가 첫째여서 어느 정도 공감이 됩니다. 그러면 뉴질랜드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다음에 또 뉴질랜드로 가셨나요? 아니면 한국에서 쭉 지내셨나요?     


(L)  대학생 때 다시 뉴질랜드에 갔었어요. 대학교 1학년 마치고서 겨울방학 때 영어를 배우려는 목적으로 갔었습니다. 부모님 권유로 1년 정도 영어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랑 성인이 되고 나서 다시 뉴질랜드에 가는 건 달라서 더욱 기대도 되었습니다. 사실 마음 한 편에는 ‘가서 편히 놀다 와야지’라는 생각도 있었어요. 그러고 뉴질랜드에 가서는 바로 대학생으로 간 것이 아니라 고등학생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친구들도 사귀고 영어도 배울 수 있는 환경이었죠.      


그러고 1년이 지나고 스스로를 돌이켜보니, 영어 공부는 제대로 안 하고 너무 놀기만 한 것 같았어요. 그렇게 여러 생각을 하다가 뉴질랜드 학교에서 물리와 화학을 재미있게 공부를 하기도 했었어요. 기존에 다니던 대학으로 복학하지 말고, 뉴질랜드에 있는 대학교를 진학해보자고 부모님과 상의를 하고 진학하기로 마음먹었어요. 대학교 1학년 때 공부를 나름 열심히 해서 과를 지망하는데 저나 부모님이 정말로 원했던 과는 못 갔지만 ‘약대’로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3학년 때까지 다녔었죠. 뉴질랜드에서 제가 다닌 대학교는 4학년까지 다니고 5학년 때는 1년 동안 인턴 과정을 수행한 후 국가고시 시험을 통과하면 약사가 되는 과정이었습니다. 총 5년 과정으로 구성됩니다.     


(G)  뉴질랜드에서 대학을 졸업해서 약사가 되셨을 수도 있었는데, 중간에 다시 교대로 오신 이유를 여쭈어 봐도 될까요?     


(L)  우선 첫 번째 이유는 제가 화학을 좋아했는데, 유기 화학을 공부하고 약과도 연관이 있었어요. 그런데 저는 무기화학을 더 재미있게 공부했지만 유기 화학(생화학)은 어려웠어요. 어렵다 보니 흥미가 자연스럽게 떨어졌고요. 두 번째 이유는 2, 3학년 때 교생 실습처럼 약국으로 실습을 가는 과정이 있었어요. 실습록처럼 적어서 여러 문제도 해결하기도 했습니다. 2학년 때까지는 조제 과정만 지켜보고, 관찰하는 느낌이었다면 3학년 때는 소위 말하는 시골에 있는 약국에 가서 무조건 2주일 동안 실습하게 되어있습니다. 이때 제가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어요. 실습할 때 머무를 곳을 구하는 것이 보통 힘든데, 운이 좋게도 담당 약사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까지만 해도 영어 회화가 능숙하지 않아서 새로운 환경에 대해 부담감이 컸어요.      


실습하는 약국은 환자가 많은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뉴질랜드에서는 약사가 환자와의 의사소통을 엄청 중요시하게 대하더라고요. 기본적인 대화(Small talk)를 기반으로 한 유대 관계가 중요했습니다. 뉴질랜드에서는 그 약국에서만 환자 이름이 나왔습니다. 한국처럼 전국적으로 통합되어 있지 않아서 각 약국에서 관리를 해주는 시스템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단골이 많이 형성되는 시스템이라고 들었습니다. 그 시스템 안에는 환자 이름과 주소까지 적혀 있었어요. 사람을 살갑게 대하는 능력이 너무 중요했는데, 저는 그런 능력이 부족했습니다. 물론 대학교 강의에서 의사소통에 대해서도 배우긴 했지만, 직접 겪으니 다른 현실에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의사와 의사소통도 엄청 많이 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뉴질랜드에서 처방전은 의사가 출력해주는 것이 아니라 글로 써주었습니다. 처방전을 받아 보고 약사가 글씨를 못 알아볼 수도 있고, 의사가 실수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환자가 어린이인데 어른이 복용하는 양으로 처방한다거나 하는 경우입니다. 한국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상황일 거예요. 만약 처방을 잘 못 하면 의사와 약사의 공동 책임이라고 하더라고요. 책임의 몫이 50:50인 거죠. 한국에서는 약사가 환자나 의사와 호주만큼으로 이야기(의사소통)도 하지 않고, 마지막에 복약 지도 정도만 하잖아요? ‘식후 30분 내에 1알씩 드세요.’ 정도로 지도해주죠. 나중에 호주에서 약사가 된 지인과 이야기 나누어보니 약사가 환자나 의사와 의사소통(대화)하는 과정은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인식하며 일하고 있었습니다. 한국과 뉴질랜드에서 약사가 일하는 환경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이런 과정을 겪어보니, ‘내가 과연 4학년, 5학년 때 이루어지는 실습과 인턴 과정을 잘 해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과 ‘국가고시를 통과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들더라고요. 실제로 한국 유학생들이 시험을 많이 탈락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면 1년 인턴 과정을 또 해야 하는 시스템입니다. 한국말로도 유대 관계를 그렇게 맺기가 어려운데 영어라는 외국어로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습니다.     


정리하자면 첫 번째는 학업적인 측면이고 두 번째는 실제적인 약사의 면모 측면에서 그만두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사실 대학교에 입학해 약사보다는 외국계 제약회사를 가고 싶었습니다. 그 당시에 막연하게 싱가포르 가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죠.


<3편에서 이어집니다.>


- 도슨트 G


구름, 20x20cm, Acrylic painting on canvas, 2021, ㄱㅇㅈ(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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