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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강 작가의 독일삶 Aug 12. 2021

죽음 전에 남는 건 사랑뿐

어느 노신사의 사랑 이야기

 그는 이승만 정권 시절, 경무대(현 청와대)에서 근무한 고위간부였다. 영특하고 현명한 탓에 VIP의 총애도 받았다. 하지만 삶마다 영욕의 터널과 격동의 시대를 지나왔을 터였다.


그의 마지막은 처연했다. 얼굴에는 핏기가 없고 지나왔던 인생의 그늘로 가득했다. 하지만 풍채를 지탱했을 골격은 품위 있고 곧바랐다. 거친 파고에도 버텨왔을 끈기와 자신감이 죽음의 그늘 속에서도 반짝였다. 비록 호스피스 병동에서 남아 있는 시간을 세고 있었지만, 젊은 시절 호령을 누렸을 위엄은 살아 있었다. 목소리는 병실을 울릴 정도로 쩌렁쩌렁했다. 삶의 마지막에도 그의 목소리와 눈빛은 힘을 뿜어냈다. 그래도 어쩌랴. 그는 생의 종착역에 도달한 가냘픈 구십의 노구일 뿐이었다.

 다행히 그가 누워 있던 호스피스 병동은 온화했다. 그가 가진 부와 명예가 독방의 지존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는 마지막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자서전을 쓰고 싶어했다. 그래서 나를 불렀다고 했다. 당시 나는 한 잡지사에서 몇 년의 경력을 지낸 기자로 살아남고 있었다. 젊었던 탓에 호기심 가득한 이십 대 후반의 시간이었다. 근대사의 기록을 남길 수 있다는 욕망에 기대감 충만으로 펜을 들었다. 하지만 그에게서 나온 첫 말은 예상 외였다.


“춘천에 사는 숙이가 보고 싶습니다!”


좀 허탈했다. 파란만장한 역사의 스토리를 캐낼 거라는 기대는 나만의 착각이었다. 그의 입술에서 터져나온 언어는 지극히 개인적이고도 감성적인 언어였다. 그의 가장 진솔한 언어는 사랑이었다.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은 아주 인생 깊숙이 숨겨져 있고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30대 젊은 시절, 춘천으로 파견 근무를 갔다고 했다. 그곳에서 스물 하나의 꽃다운 숙이를 만났고 잠깐이지만 불꽃 같은 사랑을 나눴다. 처자식이 있던 그에게 꽃다운 숙이는 하룻밤의 사랑처럼 잊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숙이를 평생 잊지 않고 있었다. 그 말을 하는 동안 노인의 입술은 내내 떨렸다. 회한이 밀려오는 듯했다. 그리고 숙이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그는 나와 만난 후 달이 지난 어느날, 생의 저편으로 떠났다. 생의 이야기를 다 담지 못한 채 한 인생은 사그라졌다. 물론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거의 한 세기를 지나온 삶을 담아낼 수 있었겠는가. 그때까지만 해도 주변에서 한 번도 죽음을 경험하지 못했던 나는 충격이었다. 죽음에 도달하는 이들에겐 어떤 명예와 부도 위로가 되지 않았고, 지나왔던 시간에 대한 추억과 회한만이 가득했다.

난 대필자의 신분을 망각한 채, 그분의 마지막 이야기를 마음껏 들어드리며 생의 불꽃이 서서히 꺼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의 마지막은 함께 하지 못했다. 다만 그의 아들에게 들은 바로는, 그의 마지막은 대체로 편안해 보였다고 했다. 아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아주 덤덤했다. 아버지가 젊은 시절에 행했던 도덕적 행위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어머니의 눈물이기도 했기 때문이리라. 화려했던 남편의 권력 속에서 아내는 사랑받을 권리를 무참히 희생하고 살아왔을 터였다. 그리고 그는 당시의 권력형 남성들이 그러했듯 만인의 여성들의 그리움을 반찬 삼아 호기롭게 살아왔을 터였다. 


 독일에 와서 생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이들에게서 헛헛한 토로를 들을 때가 많다. 대부분은 후회로 점철된 삶이었다. 그것은 사랑하지 못해 후회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것도 사치로 생각했던 이들의 시간도 있다. 나름대로 분투하고 살아왔을 터였다. 아, 죽는 것은 결코 쉽지도 간단하지도 않다.

 

현대 사회는 더더욱 죽음에 대한 논의가 더 필요한 시대다. 그만큼 일상의 삶 자체가 불확실성 투성이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주제를 삶 속에서 상기하고 있다면 삶의 집착도 부질없게 된다. 즉 진정한 내려놓음은 죽음을 상기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럼에도 죽음은 이어져온 삶과의 영원한 단절이기에 여전히 입에 올리기 힘든 주제다. 그래서인지 좀더 평안한 죽음을 위한 준비로 호스피스 완화의료가 등장한 것도 당연하다. 독일어 완화의료(Palliative Care)라는 단어는 라틴어의 Pallium과 영어의 Care의 합성어이다. 팔리움은 망토,라는 뜻으로 아픈 환우를 따뜻하게 덮어준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매년 10월 둘째 주 토요일은 ‘세계 호스피스의 날’ 로 지정하고 있다. 지난 해 코로나 기간에서도 베를린에서는 21번째 행사를 가졌다. 모토는 “Solidarität bis zuletzt“(마지막까지 연대를)였고, “Wir sind für Sie da”(우리는 당신을 위해 있다)를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호스피스 관련 단체 등에서 온라인 강연 등이 열렸고, 호스피스 관련 연극과 영화상연도 이어졌다.

근대적 의미의 호스피스는 완화의료의 개념과 상통한다. 호스피스 완화의료 의사인 시슬리 사운더스(Cicely Saunders, 1918~2005)가 이러한 연구에 있어서 창시자다. 그는 임종 말기 환우의 고통에서 육체적 뿐만 아니라 정신적, 심리적, 사회적, 영적인 부분을 강조했다. 즉, 호스피스 완화의료는 여러 측면의 고통을 완화하고 전인적 돌봄을 제공한다는 데 의의가 있다. 이러한 사회적 욕구에 따라 호스피스 관련 지원도 포괄적 복지정책의 일환으로 정착되어가고 있다.


 Deutschem Hospiz- und PalliativVerband e.V. (DHPV)(독일 호스피스완화의료협회)의 2016년 통계에 따르면, 독일에는 1500여 개의 방문형 호스피스단체, 236개의 시설형 호스피스와 300개 이상의 병원 내 완화의료병동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말기 환우들은 집에서 삶을 마감하길 소망한다. 하지만 현실상황은 그렇지 않다. 대부분 노인들은 요양시설에서 마지막을 맞는다.

그들은 가족이 아닌, 요양보호사나 간호사의 품 안에서 숨을 거두고, 아니면 홀로 눈을 감는다.


 내가 근무한 시설에 거주했던 헬데가르트 여사는 그날 밤새 끙끙거렸다. 당뇨환자였는데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여러 번 했다. 수술 부위 염증이 낫지 않아 곪고 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몰골이었다. 그의 염증부위는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처참했다. 우리 층의 수간호사에게 이야기를 했지만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단지 진통제만 투여할 뿐 다시 수술을 하기에도 힘들었다. 그는 아들이 한 명 있었지만 교도소에 들어간 상태였다. 힐데가르트 여사는 엔지니어로 성공적 삶을 살았지만 마지막은 고통 속에서 외로움과도 싸웠다.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 밤에 날 불렀다. 그는 몸이 너무 춥다고 했다. 담요를 안고 있었지만 그것으로 죽음의 한기를 막을 순 없었다. 몸안 에 염증이 많은 상태이기 때문에 추운 기운이 드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난 따뜻한 물을 넣은 보온인형을 안겨주고 조금이라도 몸이 따뜻해지도록 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꼬옥 안아주었다.


 “고맙고 미안해. 넌 정말 나에게 따뜻한 사람이야.”


그는 내 손을 잡고 말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단지 그를 안고 기도를 해주었고, 어렵게 가는 마지막 길을 동행해주었다. 다음날 힐데가르트 여사는 삶을 마감했다.

누구나 삶의 마지막은 힘들다. 단지 확실한 것은 우리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사랑을, 용서할 사람에게는 용서를 그리고 표현해야 할 따스한 말은 하는 것이 살아 있는 자의 특권이다.

마지막은 경주하는 말처럼 쏜살 같이 우리 곁에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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