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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강 작가의 독일삶 Aug 10. 2021

언제까지 독일에 머물러야 하나

어느 파독광부의 이야기

어느 파독광부 어르신의 이야기다.

 광부생활 3년 계약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가려다 독일 정착을 결정했다. 3년은 젊은이에게 길고도 짧은 시간이었다. 고국이 그리웠지만 막상 돌아가려니 망설여졌다. 돈을 보냈지만 한국 상황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고 전직 광부가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있을지 회의감도 들었다. 이왕 독일에 온 거 몇 년 더 돈을 벌어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또  독일이 경제개발 붐이 일어 일손이 부족했다. 매월 600마르크(160달러)의 높은 수입은 당시 우리나라 직장인 월급의 약 8배 정도의 금액이었다. 독일에 남으려고 하니 비자가 문제였다. 방법은 두 가지였다. 결혼 혹은 취업. 다행히 직업을 구했다. 그러나 광부의 경력으로 찾은 것은 매일 갇힌 공간에서 기계만 만지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직업을 구했기에 행복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지쳐갔다. 하루 종일 딱딱한 기계와 홀로 씨름해야 했던 그는, 몇 달이 지나자 미칠 것처럼 답답해졌다. 소통의 부재 탓이었다. 결국  파독 간호사인 아내의 권유로 선택한 것이 간호사 직업교육이었다. 병원 근무를 하면서 그때서야 행복이 찾아왔다. 비록 환우들이었지만 소소한 만남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심리학자 파울 바츨라빅(Paul Watzlawick)은 ‚우리는 매순간 소통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라고 했다. 그만큼 소통은 삶의 기초적 수단이다. 우리는 매일 일상에서 가족이나 사회와의 소통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소통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그에 따른 해답을 제시하는 기술서나 강연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렇다면 치매 환우와의 소통은 어떠할까? 대부분 고령이 된 한인 1세대들은 나이 들어 치매질환에 걸리는 것을 보았다. 치매로 현재를 잃어버린 그들에게 삶의 질은 기대할 수 없다. 치매 상황에서 외국어는 잊어버리고 모국어만 구사하는 이들이 많기에 심각성은 더 크다.

몇 년 전, 파독 간호사 어르신 한 분을 방문한 적 있다. 그는 처음 만난 자리에서 고향이야기를 꺼냈다. 자신의 고향은 ‚쑥곳‘이라고 했다. 썰물이 되면 동생들과 바지락을 캤다고 했다. 계속 말을 이어가던 그는 갑자기 호미를 찾았다. 바지락을 캐러 가야 한다고 서둘러 일어섰다. 나는 그의 시선과 관점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동생들에 관해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나의 지속적인 유도 질문에 빠져들고 나서야 호미 찾는 것을 멈추었다. 난 그분이 말한 ‚쑥곳‘이 어디인지 개인적으로 궁금했다. 그분 내면 깊숙이 그리움의 흔적이 느껴졌다. 집에 돌아와 인터넷에서 지명을 찾아보기로 했다. 허사였다.


  ‘숙곳? 쑥갓? 쑥고?‘


아마도 어린 시절에 불렀던 시골 마을 이름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야기를 하다 말고 나에게 고향이 어딘지 물었고, 다시 자신의 고향을 되풀이했다. 그날 난 반복적인 질문과 답변에 조금씩 지쳐가기 시작했지만 그의 말에 한없이 공감해주는 것으로 만남을 겨우 마칠 수 있었다.


요즘같은 하이터치의 시대에 필요한 건 소통이라고 모두들 강조한다. 하물며 치매환우와의 소통은 참으로 어려운 숙제다. 특히 치매환우 가족들간 소통에서 벌어지는 상실의 상황은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어느 날 문득 아침식사를 끝낸 어머니가 ‚우리 언제 밥 먹지?‘하며 밥을 달라고 보채면, 순간 난감해진다. 그 상황에서 울컥 하는 마음이 들다가 낙심이 된다. 어머니의 어깨를 흔들어 깨워서라도 기억을 제자리로 되돌려 놓으려 애쓴다. 자식은 현실 앞에서 간곡하고 간절하게 호소한다. 그러나 다시 이 세계로 돌아오라고 울부짖어도 소용 없다. 이미 다른 세계 속으로 빠져든 어머니는 우리들의 세계를 찾는 입구를 알지 못한다. 어머니는 어두운 심연 속에 머물며, 눈앞의 자식을 낯선 이방인으로 멀뚱히 바라본다. 치매환우의 시선에서 우리는 또다른 눈먼 자들의 세계일 뿐이다.

치매 검사에서 확정을 받고도 인정을 하지 않은 한인 1세대 어르신이 있다. 그분은 외형적으로는 비교적 건강하게 보였다. 일상적 행동에도 무리가 없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의 현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아침에 식사를 했는지 기억하지 못하고, 오늘 전화 온 친구의 이름도 누군지 모른다. 망각에 대한 상처는 단지 남겨진 환우 가족의 전유물일 뿐이다. 정작 환우 본인은 망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독일 장기요양강화법 전에는, 치매환우는 요양등급에서의 산정에 포함되지 않았다. 하지만 올바른 소통의 중요성은 일상생활의 삶의 질을 떨어뜨리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새롭게 개정된 장기요양법에서는 치매 또한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다. 정서적 단절은 일상적 삶에서 더 큰 위협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좀 다른 이야기지만, 어떤 이의 내면에 또 하나의 아이가 산다.  다 큰 어른이 철없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한다. 그것은 심리학에서 ‚“성인아이 증후군(Adult Child syndrome)”이라 한다. 이들은 특별한 이유 없이 열등감을 느끼기도 하며 타인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을 어려워한다. 부모의 알코올 중독, 역기능 가정, 폭력, 별거나 이혼 등의 가정에서 자란 자녀들에게 많이 보인다.  이들 모두 정신, 심리적으로 황폐화되어 원만한 사회인으로 성장하지 못한다.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고 연령에 맞는 발달과정이 이루어지지 못했기에 미성숙한 상태로 어른이 된다. 결국 성장과정에서 받은 상처로 인해 마음 속 위안을 받지 못한 내재된 아이가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치매환우는 또 다른 세계 속에 존재하는 아이일지 모른다. 치매 가족은 그 아이를 실재한 성인으로 복원시키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 세계 속의 아이는 오히려 그 재촉에 겁을 내며 슬그머니 자취를 감춘다. 그렇다면 치매 환우와의 대화는 빈껍데기 뿐일까? 그렇지 않다. 단순히 대화를 나눴을 뿐인데 치매환우의 삶의 질이 개선되었다는 연구결과를 본 적 있다. 매일 10분 정도 환우가 관심 갖는 테마로 지속적으로 대화를 하다보면 환우가 가진 불안감이나 신경정신과적 증상이 호전된다고 한다. 중증일 경우 그 효과는 크다. 치매환우와 소통하는 방법은 무엇보다 일반인에게 대하듯 존중하는 태도다. 치매환우의 내면 심성에서도 상대방이 무시하는 것은 금방 느끼기 때문이다. 

또한 인내력을 가지고 대답을 기다려줄 수 있어야 한다. 환우도 상대가 자신을 어떻게 다루는지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대화에 있어서는 비언어적 수단을 사용해 온화한 미소로 다가가야 한다. 가벼운 신체접촉도 마음을 여는 방법 중 하나다. 대답이 느리다는 이유로 그들과의 대화를 포기한다면 그들은 그 세계 속에서 더욱 고립되기 때문이다. 실제적 대화는 힘들지 몰라도 인간 내면의 진심은 통하기 마련이다.


이제 파독 1세대의 역사가 저물어가고 있다. 독일에서의 삶은 적응을 위한 피와 땀의 시간이었다. 헐떡이며 달려온 거대한 시간의 파고 속에 이미 과거와 현재에 대해서는 망각의 강을 건넌 이들도 보인다. 이국땅에서 치열하게 살아온 지난 반 백 년 독일 삶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눈물겨웠던 삶을 추억하고 현재에 자족하는 것도 노년의 삶인데 안타깝기만 하다. 1세대들은 어쩌면 이방인으로서 살아가는 나의 자화상일지 모른다.


언제까지 이곳 독일땅에 머물러 있어야 할까? 내가 나에게 던지는 계속되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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