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컬쳐 렌즈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찬닢channip Sep 24. 2019

폭주하는 신, 폭발의 20세기

#영화 4 <아키라(1988)>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침잠해 있는 일본인들의 내면은 어둡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가득하고, 그 속의 신과 귀신 사이의 묘한 차이가 불러오는 이미지는 기괴하다. 무슨 말인가를 좀 더 설명하겠지만, 영화는 숨 가쁘게 폭주를 하며 끝을 향해 달려가고 두려운 상상들이 만든 조형은 결국 폭발한다. 


 아키라(AKIRA)는 여러모로 올해 주목할 만한 작품 중 하나이다. 먼저, 할리우드에서 실사화 된다는 소식. 그동안 아키라는 <레디 플레이어 원(Ready Player One)>을 비롯한 영화와 애니메이션에 모티프를 제공해서 반복적으로 재생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의류 브랜드 슈프림(Supreme)과의 콜라보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아이덴티티를 구축해왔다. 실사화 과정은 이러한 것에 연속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마블 영화 <토르>의 감독이 맡기로 하였으나 마블의 페이즈 4 토르를 연출하느라 연기된다고 한다. 언제 나오게 될지는 미지수이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영화 속 시대적 배경이라는 점이다. 작품은 1988년 세계 3차 대전 당시 도쿄에 핵폭발이 일어난 이후, 31년이 지난 2019년 새롭게 구축된 범죄와 폭력이 난무하는 네오-도쿄에서의 사건을 묘사하고 있다. 더 놀랍게도, 네오 도쿄는 2020년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 우리 현실에서도 2020년에 도쿄올림픽이 개최되는 것을 상기해본다면 엄청난 우연의 일치일지 아니면 일본의 의도적인 노림수였는지 고민도 해보게 된다(올림픽이 하고 싶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는 아키라 속의 도시와 동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실제는 아니지만. 

2019년의 네오 도쿄. 고층 건물들 아래에 폭주족이 활개를 친다. 나는 영화를 관람하기 전까지는 이들의 미래 모습을 다룬 영화인 줄로만 알았다. 
아키라 이야기

 아키라를 보지 않은 사람들은 바이크 질주 영화라고도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나 본인도 일본의 미래판 '분노의 질주'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영화의 초장을 지나고 그렇지 않다는 점이 당황스럽기도 하였다. 내가 영화 속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올림픽과 과학이다. 

올림픽

 올림픽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간단히 말해서 국가 부흥을 위한, 도시 이미지 재건 및 정리의 과정이 수반되는 외적인 압력이다. 작품이 출하된 연도는 88년으로 서울 올림픽이 개최되던 시기이라서 이를 대입해볼 수도 있겠지만, 원작은 그 이전부터 있었으므로 특정하지는 않기로 하자. 80년대뿐만 아니라 오늘까지도 올림픽과 같은 대형 국제적 행사는 대외적으로 송출되는 도시의 모습을 최대한 깨끗하게 정비하고, 국가 이미지를 창출하도록 하는, 참여하지 않는 국민 모두도 보이지 않는 압력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네오 도쿄의 모습은 타락한 씬 시티(Sin City)이다. 도쿄의 행정가 8인의 최고회의체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올림픽 특수를 노리는 것은 경제적 이득이나 도시 이미지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무방비도시가 되어버린 도쿄를 살리려고 하는 시각을 관객들에게 부여하고 있다. 도시 재건의 임무를 떠안은 사람은 사리사욕을 벗어나서 본인이 올바른 사고를 가졌다고 믿는 대령이다. 올림픽을 그가 개최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도쿄'를 위해 쿠데타를 일으키고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그가 향한 곳은 테츠오가 있는 올림픽 경기장이다.

 테츠오가 본인의 몸을 컨트롤할 수가 없어서 몸이 터져버리는 곳은 올림픽 주경기장이다. 새로운 도쿄의 계획이 물거품이 되는 도착지로, 테츠오가 망가트린 올림픽 경기장은 도시 재건의 꿈을 앗아가 버린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또 다른 폭발이 발생한 2019년의 일본은 새롭게 도쿄를 만들 수 있을까?

 내용을 곱씹어보면, 영화 '아키라'는 의식(ritual)적인 사건을 통해 도쿄를 새로이 건설하려 한다. 최고 회의체가 무너져버린 이후 대령이 전권을 행사하고 있다. 무방비했던 도시가 폭발로 쓸어진 후에 그가 할 행동이란 그가 생각하는 1989년도 이전의 도쿄, 버블 경제로 융성하던 모습을 그리기 시작할 것이다. 초능력자의 폭발이 물로 씻겨 정화하는 의식처럼 도시는 그동안의 죄악을 벗겨내고 다시 태어날 것이다. 핵폭발이라는 일본인의 트라우마를 또 다른 의미로 해석하도록 하는, 일종의 트라우마 극복의 행위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재탄생한 도시의 모습은 어떨 것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즉, 대령이 꿈꾸는 도시는 군인 통치이며, 이것이 또 다른 의미에서는 제국주의적 향수를 불러일으키지는 않느냐는 것이다. 과학은 남용되었고 폭발하였지만 원 상태로 돌아갔다. 과학의 힘을 적절히 제어할 수 있는 자가 일본을 다스린다면, 네오 도쿄 이전의 모습들을 회복하고 발전된 '문명'을 이루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문명화된 모습은 서구와 비등한 힘을 겨루었던 제국주의적 광풍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게 된다.

폭발한다. 일본인에게는 자연스럽게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떨어진 2차 대전의 원자폭탄을 연상시킬 것이다.
과학과 권력

 하얗게 폭탄 머리를 한 아인슈타인을 닮은 과학자가 재앙이 될 수 있는 초능력자들을 배양하고 있다. 아인슈타인은 알다시피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에 터트린 원자폭탄 개발에 개입한 대표적인 인물이라는 점에서, 아키라의 과학자는 맹목적인 과학 발전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고찰하게 한다. 만약 원자폭탄을 개발하지 않았더라면, 일본은 2차 대전 원폭 피해의 그 많은 고통을 겪지 않았을 것이라며 스스로에게 항변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과학은 영화 속에서 통제당한다. 초능력자 담당자인 대령은, 과학자가 지나치게 실험체에 욕심을 보이자 그에게 경고를 준다. 그리고 통제를 벗어난 순간 역사적 현실처럼 일본의 일상은 재앙이 되어버린다. 이미 초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게 된 테츠오는 그의 몸도 그를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힘이 생긴다. 테츠오 이전의 어린 초능력자들은 그를 막아보려 하지만 역부족이다. 과학으로 얻은 지식들이 통제되지 않는다면 그때부터는 문제가 되고 제어가 필요하다. 

 초능력을 쓰는 아이들은 어린이의 몸이지만 얼굴은 폭삭 늙어버린 실험체들이다. 작은 존재에 초능력, 일종의 신격이 부여된 존재들은 기괴하고 창백하고 추측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이 존재들도 갇힌 생활에서 저항하려는 시도를 하였지만 도망가지 못하는 것을 안 뒤에는 기존 시스템에 순응하는 자세를 취한다. 그들의 목적은 도시를 유지하였으면 하는 것으로 테츠오를 막고자 한다. 신이 되려는 자를 막기 위해서는 또 다른 신에게 의존해야 된다. 그리고 신들은 인간의 모습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으며, 기괴한 모습은 과학이 인간에게 주입한 힘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과학이라는 그 자체가 왜곡된 형태로서 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린이들이나 테츠오라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신이 될 수 없는 것은 인간적인 미숙함으로 인한 것이지 과학이 아니다. 

 이제 과학이라는 신을 차지한 사람이 권력을 갖는다. 일본에서 과거의 신은 인간이 잘못된 행동을 경계하도록 경외의 대상이 되어야 하였다. 일본의 불교 미술에서만 보아도 부처는 자애로운 모습보다 엄숙하고, 때로는 서늘한 느낌마저 준다. 또한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지만 '분노존(분노하는 불상)'들을 제작하며 명왕의 이미지가 재생산되었다. 이는 일본의 다른 만화에서도 이름과 이미지들을 차용하여 계속되어 사용되고도 있다. 그 대신에 인간에 대한 묘사는 사실적이고 이상화되지 않은 채 표현되었다. 인간이란 얼굴의 주름, 감정의 상태까지 묘사될 수 있는 눈에 잡힐 수 있는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무섭고 어두운 신은 과학이 되어 조금은 통제할 수도 있도록 되었다. 인간의 몸에 신을 주입하여 신이 되어버린 아이들은 인간이 만든 연구실 안에서 살 수밖에 없음을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렇지 못한 테츠오는 연구소를 뛰쳐나가 신을 감당할 수 없는 채로 죽음을 맞이한다. 여전히 신적 존재란 어디에 비견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신의 권력은 지하 깊숙이 묻힌 소년 '아키라'의 존재처럼 그의 힘을 열었을 때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 힘을 통제하면서 사용하려는 대령은 과학의 신관으로서 도쿄 사회를 재건하고 있다.


 아키라를 연구한 영화 논문이 상당수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을 연구한 것은 많았지만 애니메이션 아키라를 언급한 학술지는 찾지 못하였다. 

아키라 역시 전후 일본 사회의 원폭 트라우마를 다룬 작품이다. 과거와는 다른 모습으로 패전 이후의 일본을 재정립하는 과정을 시각적으로 제시하였다고 할 수 있다. 디스토피아 내용을 다룬 것은 많지만, 지금까지 회자되는 미장센과 숨 가쁘게 조여 오는 일본적인 사운드 활용은 영화 형식만으로 수작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지표이다. 

 물론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특히 한국인으로서 마음 편하게 보기는 쉽지 않다. 20세기 일본인의 트라우마는 우리와도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 상징을 곱씹을수록 현재까지도 유효한 20세기의 잔재는 트라우마를 극복하기보다 외부의 존재들에게 얼마나 공격적일 수 있는지, 그리고 심지어 애니메이션, 영화뿐만 아니라 고급 하위문화 전반을 걸쳐서 퍼져 있는 일본의 배타성을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도 고민해보게 된다. 

 우리도 20세기 민족주의적 개념을 이용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일본처럼 배타적 사회 형성이 되어 우리에게 독으로 돌아온다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원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 글을 7월부터 계속해서 마무리를 하고 있지만 이제야 갈피를 잡게 된 것은 헬싱키에서 들었던 특강이 다소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망가(일본 만화)'와 '애니메(일본 애니메이션)' 연구는, 그 연구자들이 일본과 동아시아 역사적 관계에서 일어나는 맥락을 무시해도 적당히 글을 발표하고, 정치적, 경제적인 배경을 대입해야 한다는 나의 질문은 그들에게 가능한 해석이고 흥미로운 지점에 불과했다. 미디어가 주입하고 있는 가치를 비판적으로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그의 발표 첫머리를 생각했을 때 상당히 의아하였고, 미디어는 사회적 의견을 반영하며 상호적인 유기성을 보인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나에게, 우리에게는 당연한 것이 그들에게는 선택지일 뿐인가 생각하였다. 우리가 인식하는 일본은 다른 서구권 나라들과는 전혀 다르다. 어쨌든 그들이 아니라 우리가 피해자임을 증명해야 하는 것은 억울하지만 우리의 몫이며, 다만 민족주의에 깊이 빠져만 있을 것이 아니라 전략적으로 그것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우리의 과제가 아닐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인처럼 침잠해있는 두려움을 미리 생각한다거나 초월적 존재에 압도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러한 점이 우리가 아키라를 보며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조건이며, 일본 문화에 매력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비판적인 시각으로 영화를 볼 수 있도록 만들지 않을까. 신이 폭발하더라도 믿지 않으면 그만이다. 


 


평점 3.5/5.0


여담: '아키라'라는 이름이 꽤나 '고질라'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이름도 일본으로 발음하면 '고지라'가 되니 비슷하다고 느껴지고, 괴수 같은 미지의 생명체 같다는 느낌도 그렇고. 실제로 아키라는 아이였지만.

매거진의 이전글 '아그라바'는 어디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