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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사이 Aug 26. 2018

우리는 어른의 눈으로 아이들을 바라본다.

청소년에게도 참정권이 주어져야 한다.

이미 어른이 된 이들에게 아이들의 고통은 고통스러운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지나간 고통이다. 지금의 자신이 겪고 있는 ‘어른의 삶’이 더 힘들기 때문에 이미 과거로 자리 잡은 학창시절, 청소년 때가 고통만으로 남아있지 않다. 기억에 포토샵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도 과거는 현재보다 대부분 좋았던 시기로 남는다.     


나는 이런 포토샵 된 기억이 어른과 아이들 사이의 벽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그 때가 제일 좋다.”, “아무리 힘들어도 사회생활보다 힘들까.” 등등 이런 말들을 듣지 않고 자란 사람은 잘 없을 것이다. 근데 이런 말에는 큰 문제점이 있다. 고통이란 것은 무게를 재듯이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이들이 겪는 고통이 어른의 고통보다 무조건적으로 힘들지 않다는 것은 아이들을 무시하는 발언밖에 되지 않는다. 아무리 아이들이 잘 이겨내길 바라는 마음에서 한 말이라고 해도.      


10대의 아이들에게 지금 자신의 인생에 생긴 문제들보다 큰 문제는 없다. 당연히 그 아이에게는 그것이 가장 큰 고통이다. 어른은 아이들보다 조금의 인생을 더 산 것은 맞지만 같은 시기를 산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같은 고통을 겪지 않은 어른이 아이들의 고통을 함부로 판단할 자격은 없다고 생각한다.

친구라 해도 같은 인생을 살지 않기 때문에 함부로 판단하지 않듯 우리는 10대의 청소년들에게도 어른의 시선으로 아이들의 고통을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런 맥락으로 생각했을 때 청소년들에게도 참정권이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한민국은 대통령부터 시도의 장, 구군의 장, 그리고 교육감 등 모든 투표의 권한은 만 19세 이상의 ‘어른’에게 주어진다. 다른 선거들도 마찬가지 이지만 한꺼번에 변하기 힘들다면 교육감 선거만큼은 아이들에게도 참정권이 주어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나라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고 있고 학교를 다니지 않는 아이들에게는 ‘학교 밖 청소년’이라고 부를 만큼 10대 청소년들과 학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다. 그런데도 교육감 선거는 여전히 아이들의 참정권 없이 진행되고 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아이들이 겪는 고통은 아이들만이 정확히 알 듯 이 아이들의 고통을 줄이고 더 나은 학교가 되기 위한 교육감 선거는 아이들에게 선거할 권리를 주어야 한다.    


2013년 헌재 결정문에 의하면 19세 미만의 미성년자는 정치적 판단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자율성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미국 아동발달연구소 교수 필립 젤라조에 의하면 투표 같은 사실과 증거에 기반을 둔 의사결정 능력은 16세가 되면 거의 완성된다고 말했다. 발달적으로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판단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자율성을 갖추지 못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면 참정권을 주지 않는 방법이 아닌 정치적 판단을 할 수 있도록 교육을 통해 아이들을 도와주는 것이 옳은 것 아닐까.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참정권을 주지 않는 것, 아이들의 고통이 어른의 고통보다 가볍다고 생각하는 것 모두 어른의 시선에서 바라본 아이들의 모습이다. 어른의 시선에서 바라보지 않은 아이들의 이야기를 반영할 수 있도록 청소년들에게 참정권을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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