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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사이 Apr 23. 2020

'시속 80km'는 제 속도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번 생은 처음이라> '신피질의 재앙'

좀 신중하고, 느린 것이 나인데도, 그 '느림'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인지 "이제부터 하면되지"라는 말이 "이제는 시작해야지"라는 말로 들렸던 시기가 있었다.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언제나 고맙고, 든든한 일이지만, 응원이 기대처럼 느껴지고,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실패자가 되어 버릴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나는 남들보다 빠른 편이 아니다. 몸으로 하는 달리기를 했을 때도 그랬고, 마음으로 무언갈 결정하거나 도전할 때는 더더욱 그랬다. '언제 끝낼 거냐'라는 말은 들은 적이 없지만, '언제 시작할거냐'라는 말은 종종 들어왔다. 남들보다 먼저 시작하거나 남들보다 빨리 해내는 것에는 자신이 없었다. 조금 천천히, 진득하게 해내는 사람이 나였다. 그래서 나의 시간은 남들보다 느리게 흘러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사실 좋게 표현해서 이렇지, 매사 느린 나 스스로가 좋아보이지 않았었다.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 1회의 끝무렵, 극 중 세희(이민기 분)가 지호(정소민 분)에게 말한다.

세희 "그 짧은 문장에 '서른'이란 단어를 3번이나 쓰다니. 신피질의 재앙이네요."
지호 "네?"
세희 
"스무살, 서른 그런 시간개념을 담당하는 부위가 대뇌 바깥 부분의 신피질입니다. 고양이는 인간과 다르게 신피질이 없죠. 그래서 매일 똑같은 사료를 먹고, 매일 똑같은 집에서, 똑같은 일상을 보내도 우울하거나 지루해하지 않아요. 그 친구한테 시간이라는 건 현재밖에 없는거니까." 
"스무살이니까. 서른이라서. 곧, 마흔인데. 시간이라는걸 그렇게 분, 초로 나누어서 자신을 가두는 종족은 지구상에 인간 밖에 없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나이라는 약점을 공략해서 돈을 쓰고, 감정을 소비하게 만들죠. 그게 인간이 진화의 댓가로 얻은 신피질의 재앙이에요. 서른도, 마흔도, 고양이에겐 똑같은 오늘일 뿐입니다."


신피질이 무엇인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던 나는 신피질로 위로를 받았다. 



인생에 고속도로처럼 시속 70~80km으로 달려야되는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닌데, '신피질의 재앙'에 사로잡혀 사회적 나이나 기준에 맞추다가 오늘의 하늘과 고양이,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오늘의 나를 보지 못하고, 그러다 끝내 나의 속도를 잃으면 언젠가는 나의 액셀과 브레이크를 밟을 타이밍조차 놓치게 되지 않을까 무서워졌다.


고민하는 시간이 길다고 해서, 조금 늦게 출발한다고 해서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모두들 똑같은 오늘을 살지만, 오늘의 의미는 모든 사람에게 다를 것이니까. 누군가에게 오늘은 쉬어가는 날일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열심히 걸어야되는 날일수도 있을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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