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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사이 Jun 12. 2021

흔하지 않은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다르지 않은 듯 다른

나는 글을 쓸 때 보통 글감을 떠올리고, 첫 문장을 쓰기 시작하고, 초안을 쓰고, 퇴고를 거쳐 겨우겨우 한 편의 글을 완성시켜 발행을 한다.

그러나 번뇌는 거기서 끝이 아니다. 왜냐하면 조회 수, 라이킷 수, 구독자 수까지 신경쓰이는 부분이 한 두군데가 아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지 기억나지도 않는 어린시절부터 글자를 좋아했다.

할머니의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면서 간판에 적혀 있는 글자를 읽었었고, 동네 단과학원에서 한문 수업을 한다고 했을 때 조르고 졸라서 학원에 다녔었다. 5년동안 한자를 배우며 글이 좋았고 배우는 것이 좋았다.


한자 덕분인지 공부하지 않아도 국어는 금새 좋은 점수를 받았었다. 그리고 오후에나 방학때는 도서관에 살며 책을 읽었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지나 20살이 되어갔다. 글을 좋아했지만 너무 불투명한 미래가 걱정된다는 부모님의 염려에 글과 전혀 상관없는 사회복지를 공부했다. 글에서 멀어졌다고 낙담하는 것도 잠시 한 과목 한 과목을 배워갈 때마다 내가 사회에 대해 알고 공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글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전부터 알고 있던 브런치에 작가신청을 하였다.


크게 노력하지 않았던 첫 도전을 뒤로 하고 심기일전하여 두 번째 도전했을 때  다행히도 합격장을 받을 수 있었고, 그 때가 벌써 3년이 다 되어간다. 그동안 나는 120여편의 글을 적었고, 120명이 넘는 구독자분들이 감사하게도 내 브런치를 구독해주고 있다.


그러나 뽀족한 글을 쓸 때면 언제나 심장이 요동친다.

너무 과하게 다듬어지지 않은 글은 아닌지, 혹은 나의 편협한 생각으로 적힌 글은 아닌지.  

점검하고 또 점검하며, 수십번의 퇴고끝에 글을 발행한다



조지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에 보면 이런 글이 있다.

지난 10년을 통틀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었다. 나의 출발점은 언제나 당파성을, 곧 불의를 감지하는 데서부터다. 나는 앉아서 책을 쓸 때 스스로에게 '예술 작품을 만들어내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내가 쓰는 건 폭로하고 싶은 어떤 거짓이나 주목을 끌어내고 싶은 사실이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나의 우선적인 관심사는 남들이 들어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미학적인 경험과 무관한 글쓰기라면, 책을 쓰는 작업도 잡지에 긴 글을 쓰는 일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중략) 내가 할 일은 내 안의 뿌리 깊은 호오와, 이 시대가 우리 모두에게 강요하는 본질적으로 공적이고 비개인적인 활동을 화해시키는 작업이다.


시작은 사회에 대한 나의 목소리를 내고 싶었다고 해도 내가 120여편의 글을 발행하며 계속해서 뾰족한 글을 쓰는 이유는 남들과 다른 나의 글을 쓰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누군가는 '밥상'이라고 하면 엄마가 해 준 집밥을 떠올리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밥상위로 젓가락이 날아다니던 순간을 떠올리는 것처럼. 

그런 각지고 뾰족함을 통해서 다름을 나누고 더 나아가 틀린 것은 알릴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었다



지금의 나는 처음의 나보다 글을 쓰는 시간도, 퇴고를 하는 시간도 오래걸린다.

아이러니 할 수도 있지만 더 꼼꼼히 보는 시간이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글의 조회수도, 구독자 수도, 라이킷 수도 모두 다 불투명하고 때로는 걱정될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더욱 뾰족해 질 것이다, 그렇지만 뽀족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잘 다듬어진 글을 쓸 것이다.


가장 공적인 글을 쓰면서도 다듬어져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글을 쓰는 일. 

그것이 나의 목표이며, 비록 구독자가 적고 조회수가 높지 않아도 내가 그만두지 않을 수 있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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