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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사이 Jul 22. 2019

한국에서 산다는 이유로 견뎌야되는 불평등은 없어야한다.

영화 <죽여주는 여자>를 보고.  

영화의 주인공인 소영은 박카스 할머니다. 공원에 주로 있으면서 지나가는 남자들(대부분 노인)에게 박카스를 권유하고 "잘해준다"고 하거나 "나랑 연애할래요?"라고 말을 하며 모텔로 간다. 모텔비 포함해서 4만원의 비용을 지불하면 성매매가 이루어진다. 소영은 그렇게 돈을 벌어 먹고 살고 있다.


"다들 손가락질 하지만, 나같이 늙은 여자가 벌어먹고 살 수 있는 일이 많은 줄 알아? 꼴에 빈병이나 폐지 주우면서 살긴 죽기보다 싫더라고." -by. 소영

몇몇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박카스 할머니'를 향한 우리 사회의 부정적인 인식들을 담으면서도 주인공인 소영의 담담하고 떳떳한 행동과 말을 통해 비참하거나 우울하지 않게 했다. 노인 빈곤률 1위의 시대에 살고 있는 지금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 아닐까.


그러던 어느날, 소영은 1년 전쯤까지 자신의 손님이었던 한 할아버지가 중풍에 걸려 요양병원에 입원해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간다. 병원에 누워 혼자서는 먹지도, 씻지도, 화장실조차 못가는 자신이 비참하고 더이상 살고 싶지 않다며 소영에게 자신을 죽여달라 부탁한다. 그렇게 영은 한 사람의 자살을 도와주었다.

얼마 후 치매가 걸려 더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자신의 친구를 죽여달라 부탁했고, 그 이후 친구의 죽음을 부탁했던 할아버지 역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며 수면제를 먹을 때 함께 있어달라고 부탁받는다. 그렇게 소영은 세 사람의 죽음을 함께 한다.


누군가는 이 영화를 보며 죽여달라는 고작 몇 마디 말에 어떻게 사람을 죽이냐고 이해할 수 없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유없이, 혹은 사는 것이 행복할 때 죽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병들고, 가난에 지치고, 아무도 없이 혼자가 되어 며칠, 몇달, 어쩌면 몇년을 더 사는 것이 그저 연명하는 것이라고만 생각될 때 죽음을 생각하게 되는 것 아닐까. 연명하는 그 순간에도 계속 아프고 지치는 시간을 견디면서. 영화 속 인물들은 그런 생각들의 끝에 자살을 선택한 것 아닐까.


실제로 스위스에는 엑시트나 디그니타스 등의 조력자살 단체가 있다.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이 도움을 청하면 여러 차례 정신과 의사와의 상담을 거쳐 의사들이 만장일치로 동의할 경우 조력자살이 가능하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죽음을 터부시할 뿐, 죽음에 대해 합의된 부분이 없다. 연명, 안락사, 웰다잉 등 이제는 죽음에 대해 논의되어야 하지 않을까.



조력자살이나 죽음뿐만 아니라 사실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노인 성매매, 노인 빈곤, 저소득층 장애인, 이주여성, 코피노, 성소수자들 이외에도 우리 사회는 논의되지 않은 수많은 쟁점을 끌어안고 있다. 이 쟁점들이 합의는 커녕 제대로 된 논의조차 되지 못한 채로 여전히 남아있다. 그리고 그렇게 남아있는 쟁점들은 계속해서 이들을 궁지로 몰아가고 있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힘들지만 대한민국에서 살아간다는 이유로 그들이 차별과 불평등을 견뎌내야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문화나 생활방식의 차이가 아닌, 늙거나 장애인이 되는 것, 빈곤, 이민, 혼혈로 태어나는 것, 성적 취향이 다르다는 이유 등으로 차별을 받거나 불평등한 환경에서 살아가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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