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심리학을 통해 바라보는 교실 속 이야기
문제행동에 주목하면 인간은 그 문제행동을 반복한다.
혼내는 것은 나쁜 습관을 들이는 최고의 훈련이다.
-아들러의 ‘인생에 지지 않을 용기’ 191쪽 발췌.
이는 앨버트 반두라의 행동조성법과도 일치한다.
중학교 때였다. 담임선생님이 반장인 내게 몽둥이를 주며
자습시간에 떠드는 아이들을 그걸로 때리라고 하셨다. '우리 반'이 하나로 똘똘 뭉쳐서 좋은 성적을 올리려면 규율과 복종이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문유석의 개인주의자 선언 발췌.
발령초기였다. 교무실에 급하게 내려갈 일이 생겨서 자습을 시켜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때 갑자기 반장이 일어나서 교실 앞으로 나오더니 칠판에 다음과 같이 글을 썼다.
“떠드는 아이”
“돌아다니는 아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나는 한 마디 하려고 했으나 재차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부리나케 교무실로 내려가야만 했다.
내 마음이 불편한 이유는 2가지였다.
1) 교실에서 떠들고 돌아다니는 것이 나쁜(?) 행위인가?
2) 임원의 역할은 친구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인가?
1) 교실에서 떠들고 돌아다니는 것이 나쁜(?) 행위인가?
교실은 실내다. 실내에서는 정숙해야 한다.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 바로 교실이다. 그렇다면 교실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가능한 곳일까? 수업을 하다보면 다른 반 수업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는 청각주의력이 낮은 아이의 주의를 산만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서 교실이라는 공간이 소리를 흡수하거나 다른 곳에서 시작되는 소리를 막아주지 못한다는 의미다.
물론 아이들이 있는 교실이라는 공간에서 속삭이며 의사소통을 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소리를 내는 주체가 일정 수를 넘어서는 순간 소리는 묻히기 시작한다. 소리가 소리에 의해 묻히면 점차 소리의 크기 경쟁이 시작된다. 한 마디로 목소리 큰 사람이 교실을 장악하는 것이다.
교실이라는 공간은 학생이 배우는 곳이다. 서로의 생각을 활발하게 주고 받으며, 의사소통을 해야 하는 공간이다. 그 곳에서 자신의 생각을 표현 할 기회를 ‘떠드는 아이’로 치부해버린다. 더 이상 교실은 생각이 피어나지 않는다. 아이들은 움직이고 싶어한다. 대근육이 발달하는 저학년 시기에는 빠르게 뛰고, 넘어선다. 대근육의 발달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소근육이 발달하는 고학년이 되면 그림을 그리거나 낙서를 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아이들 움직임의 원인이다. 이러한 발달을 촉진하기 위해서 국어, 체육, 음악, 미술과 같은 표현 교과가 있다.
하지만 아이들의 움직임을 ‘실내정숙’이라는 미명아래 제한하고, 움직이면 ‘나쁜 아이’로 인식한다. 하지만 ‘나쁜 아이’로 지목된 아이에게는 Wegner의 정신통제의 역설적 효과(Ironic effects of mental control)가 나타난다. 예를 들면 떠들지 않고, 돌아다니지 않으려는 행위에 집중할수록 떠들고 싶고, 돌아다니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Wegner의 실험에 따르면 실에 추를 매달고 피 실험자에게 추를 ‘앞뒤로 움직이지 마세요.’라고 지시를 내리자, 잠시 후 추가 앞 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체적으로 스스로의 자율성을 침해당한 것에 대해 본능적으로 저항(자기보호)가 시작된 것이다. 결국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아이는 다시 떠들고 돌아다니게 되고, 이는 다시금 ‘나쁜 아이’라는 낙인으로 돌아온다. 이는 ‘떠들고 돌아다닌 아이’의 이미지에 대해 초두효과(솔로몬 애쉬, 처음 입력된 정보가 나중에 습득하는 정보보다 더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아이 스스로에게, 그리고 친구들에게.
학생의 학업성취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개인적 변인 self-reported grade(John Hattie, 2015)다. 그런데 떠들고, 돌아다니면 ‘나쁜 아이’라고 평가하는 개념이 교사와 학생 사이에 공유되고, 이러한 개념은 떠들고 돌아다니는 행위를 했던 모든 아이에게 부정적 자아개념을 형성하는 원인이 된다. 결국 스스로에 대한 평가를 낮추게 되고, 이는 학업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아무리 교사가 과정 중심, 노력 중심의 Carol Dweck이 말하는 칭찬을 하더라도, 이미 작동하는 초두효과로 인해 그 영향력을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 뿐만이 아니다. 이러한 부적 정서 경험은 스스로가 가진 자원을 축소시킨다. 하지 말아야할 행위에 집중함으로써 스스로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자기 인식이 낮아지는 것이다. 이는 자아성찰기능의 발달을 제한하는 것으로 보인다. 스스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해야하는지 인식하지 못한다. 결국 아이들은 교사나 부모가 쥐어 주는 목표에 따라 움직이는 수동적 태도를 얻게 된다.
2) 임원의 역할은 친구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인가?
학급 임원 선거를 할 때마다 아이들이 하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 반을 위해서 열심히 봉사 하겠습니다.”
아이들은 열심히 봉사한다. 떠드는 아이, 돌아다니는 아이의 이름을 적고 이들의 행위를 교사에게 고발한다. 과연 임원이 해야 하는 ‘봉사’는 친구의 잘못을 지적하고 이를 널리 알리는 일인가? 그래서 성인이 되어서도 타인의 잘못을 지적하고 널리 알리는 일에만 치중할 뿐 진정한 봉사는 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아마 제대로 된 임원으로서의 ‘단련’을 받지 못한 채 성인이 되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나는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매니페스토를 활용한다. 임원으로서 공약을 게시하고, 스스로 공약의 실천여부를 점검하도록 한다. 공약은 3가지로 제한한다.
개인의 성장, 가족의 행복, 학급을 위한 봉사.
3가지 목표는 먼저 구체적이고 실천이 가능해야 한다. 다음으로 측정 가능해야 하며, 마지막으로 매일 실천할 수 있는 일이어야 한다.
스스로 실천 목표를 구체적으로 정하게 함으로써 자율성을 보장하고, 매일 스티커로 자기 점검을 하여 노력의 결과를 수치화, 시각화함으로써 유능성을 키워주며, 교사가 점검하지 않고 학생 스스로 자기 점검을 하도록 함으로써 신뢰로운 관계성을 유지 발전시키려고 하였다.
또한 타인의 행동변화는 지시와 명령을 통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공약을 실천하는 행동(모범이라는 낱말에 어울리는)이라는 것을 느끼게 하고자 하였다. 더 나은 행동을 경험하고 배우지 못해서일 뿐 인간은 늘 성장하려는 욕구를 갖고 있음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임원이 된다는 일은 단련을 받는다는 것이다. 다른 친구들보다 한 걸음 더 노력하는 것이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노고를 매일 실천하는 것이다. 그 속에 단련이 있고, 성장이 있다. 임원은 타인의 잘못을 지적하고 알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으로 타인에게 메시지를 던져주고, 함께 성장하도록 손을 잡아주는 데 있다.
교육의 목적은 아이들의 행복이다. 행복이란 함께 성장하는 속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아이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학교가 있다. 임원을 한다는 것은 보다 더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일이다. 성장하는 기회란 단련 속에 있다. 나는 미성숙하고, 자기조절하지 못하는 아이가 임원 활동을 통해 스스로 더 성숙하고, 자기 조절할 수 있는 단련의 기회로 삼도록 돕고 싶다. 그것이 교사의 역할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를 위해, 우리 아이들을 위해, 우리의 미래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