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에서, 신천에서 맥주를 마시며 울고, 카톡 프사에 말 못하는 아가일 적 사진을 올리며 버티고, 마음공부와 명상을 시작하고. 사춘기를 앓는 아이 옆에 있는 엄마들 이야기다. 너무 무슨 말인지 알고, 나역시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마음 상태로 살았던 시간이 있었다. 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둘째가 지금 그 구간안에 있기도 하다. 아주 가끔 눈물이 나는 날이 있는 정도?
마음이 전과 같지 않고 불쑥불쑥 튀어오르고 화가 나는데 왜 화나는지도 모르고,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던 엄마의 웃음소리도 거슬리고 아빠의 말투도 마음에 안 들고. 그게 타당하지 않으니 차분히 말로 할 수도 없는데 너무 불편하니까 짜증이 새어나가고.
정상적인 성장과정인데 아이마다 성격과 기질이 다 다르기도 하고, 처한 환경에 따라 사춘기를 각양각색으로 보낸다. ‘수용’이 될 것 같은지에 따라 참거나 표출되거나 차이가 나는 것 같다. 문화적으로는 전보다 수용 가능해졌고, 집집마다 부모와의 관계, 부모의 수용성에 따라 개인차는 좀 있다. 부모가 무서워서든 실망할까봐서든 그 짜증을 속으로 삭이거나 밖에서만 푸는 아이들도 있고, 어쩔수 없이 새어나오는 경우, 너무 심하게 폭발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집 아이들은 이 시기에 둘다 똑같은 말을 했다. ‘나도 내 마음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그게 참 힘든 것 같았다. 사실 딱히 방법은 없다. 시기의 문제니까 그 시기를 지나는 수밖에. 달리 말하면, 지나면 된다. 지나는 동안 저렇게 말할 수 있는 정도가 최선인 것 같다.
엄마라는 자리에서 그들과는 또 다른 입장으로 같은 시기를 지나는 사람으로서, 저 말을 들어주는 것 이상은 해줄 수 있는 게 뭐가 더 있을까도 싶고. 아니, 분리의 아픔을 견디는 게 엄마 사람의 몫이겠지. 특히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던 엄마들은 이 앓이가 좀 힘들긴 해서, 당사자와는 또 다른 어려움의 시기를 보내기도 한다.
오늘 이 시기를 지나는 친구랑 잠깐 만나서 커피 한잔 후딱 마시고 들어왔다. 말 안 해도 친구 눈에 맺힌 눈물이 뭘 의미하는지 너무 잘 알 것 같다. 우리는 지난 세대 부모의 정서적 보호를 받지 못한 채로 어른이 되어, 아이를 낳고 내 아이에게는 그 어려움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고 다짐하며 노력한 세대다. 대를 끊겠다는 마음으로 스스로 엄마의지를 강하게 다진 부분이 있다.
요즘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들, 학생인권조례, 아동학대법이 현장에서 적용될 때 왜곡되는 현상들을 보면서 엄마들도 생각이 많아진다.
대부분의 엄마들은 누군가를 해칠 생각은 없었을테지만, 삶의 부조리함으로 말할 수 있으려나. 잘 키워보자는 생각이, 내가 겪은 어려움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생각이, 역시나 현장 속 부조리함, 학교 안 사람들(교장교감, 교사, 행정직원, 다른 학부모 등)의 삶의 부조리함 등과 만나면서 진상 갑질러가 되어버리기도 하는 것은 아닌지.
마음 복잡하고, 나와 친구의 일상에서의 힘듦도 여전하지만, 그래도 이 더위를 지나면 가을 바람을 맞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서 배운다. 아무 목소리도 없던 때보다는 더 나아지는 날로 가고 있다고 말이다. 삶의 부조리함은 영원한 숙명일지라도, 그 안에서 사람들이 연결되어 살아가려면 어떻게든 조율이 되어야 할테니까 말이다. 최대한 모든 이가 덜 불행한 방법을 찾아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