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폐소 공포증은
'세계 최장 광폭터널'
서울 외곽 순환고속도로 북부구간을 달리다 보면 유난히 터널이 많이 나온다. 그중 송추 IC와 호원 IC 사이에 위치한 사패산 터널 입구에 저런 문구가 써진 팻말이 걸려있다.
십 년 전 처음 사패산 터널을 지나가던 날 입구에 걸린 저 팻말을 본 이후에 나에게 갑자기 공황이 찾아왔다. 평소에 폐소 공포증이 있던 나는 터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날도 약간의 긴장과 함께 터널 입구로 들어서려는데 순간 '세계 최장'이라는 문구가 내 머리에 그대로 박혔다.
어떻게 손 쓸 새도 없이 시속 100킬로미터의 속도로 터널에 진입한 난 갑자기 터널 안이 너무 답답하게 느껴져 겁이 덜컥 났다. 갑자기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리고 핸들을 잡고 있는 손가락이 뻣뻣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숨이 차 오며 터널 안의 모습이 서서히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종아리 근육이 오그라들고 있었고 눈꺼풀이 파르르 떨려왔다. 숨이 점점 막혀와 난 이러다가 사고가 날 수도 있겠다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창문을 내리고 심호흡을 했다. 터널 안 무거운 공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셨다. 돌아가신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 도와줘!'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쓰며 주변을 살피니 차를 세울 수 있는 공간이 중간중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다행히 4킬로미터 남짓한 터널을 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어렸을 때 교회에 잠시 다니기도 했었지만 딱히 종교가 없는 난 살면서 다급하거나 걱정스러운 일이 생길 때면 엄마를 찾곤 한다. 그것만으로도 위안을 받기도 하고 가끔은 정말 엄마가 도와주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지금 너희 엄마가 많이 위독한데 집에 어른 안 계시니?"
다급한 목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내 귀로 흘러들었다.
"위독이요?"
내가 막 5학년이 되던 해 3월 어느 날 집으로 걸려온 전화였다.
그 당시 '위독'이라는 말의 정확한 뜻은 알 수 없었지만 엄마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겼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아빠 안 계시니?"
"아빠는 안 계시고 오빠가 있는데......"
그때 옆에 있던 중학생이던 오빠가 울음이 터진 내게서 수화기를 낚아챘다.
"여보세요? 네? 강릉ㅇㅇ병원이요? 네? 네......"
수화기를 내려놓는 오빠가 하얗게 질려 울고 있었다.
"오빠! 무슨 일이야? 엄마가 왜?"
엄마는 친구들과 오랜만에 떠나는 여행으로 며칠 전부터 들떠 있었다. 새로 옷을 사고 신발도 샀다. 난 그렇게 행복해하는 엄마의 얼굴을 보는 게 좋았다. 그랬던 엄마가 여행을 떠난 지 이틀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넋이 나간 오빠는 전화를 끊자마자 아빠를 찾아 밖으로 나갔고 그날 저녁 난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집으로 찾아온 이모가 나와 동생을 보자 오열을 했기 때문이다.
"저 어린것들을 두고 가버리면 어쩌라고......"
"이모! 엄마가 죽었어?"
난 울먹이는 목소리로 이모의 옷을 잡았고 이모는 그런 나와 동생을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었다.
저혈압으로 쓰러진 엄마는 그렇게 우리의 곁을 떠났다.
엄마는 선산 한 귀퉁이에 묻혔다. 양지바른 곳이 아닌 햇빛 하나 들지 않는 산 내리막 한 귀퉁이에 엄마의 초라한 무덤이 만들어졌다. 좋은 자리도 많은데 왜 그런 구석진 곳에 엄마의 무덤을 만들어야 했는지 이해가 안 됐다.
"가서 엄마한테 인사하고 와!"
명절에 성묘를 가면 조상들의 무덤에 차례를 지내고 난 아빠가 정작 당신은 가지 않으면서 우리들에게 하는 말이었다.
우리 삼 남매는 산 내리막 뒤로 돌아갔다.
엄마의 무덤은 늘 쓸쓸했다. 햇빛 한줄기 들지 않는 그곳은 어두웠고 추웠다. 그늘이 지는 곳이다 보니 바람도 유난히 차게 느껴졌다. 찬바람이 엄마의 작은 무덤을 쓸고 내 얼굴을 때릴 때면 난 코끝이 찡해지곤 했다. 그 초라하고 차가운 땅속에 엄마가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엄마가 너무 춥고 답답할 것 같았다. 그 답답한 땅속에 있을 엄마가 가여웠다.
난 조용히 풀을 뜯고 엄마에게 인사를 한다.
'엄마! 땅속이 많이 답답하지?'
굳이 핑계를 대자면 나의 폐소 공포증도 그때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