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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둘 May 10. 2023

치과에 누워

공포에 빠지다.

관자놀이 주변으로 희끗하게 올라오던 흰머리가 어느새 헤어라인 주변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좋으련만 나이가 들어 보이는 게 왠지 싫었다. 검은콩이 두피에 좋다는 맹목적인 믿음을 갖고 있던 나는 인터넷을 뒤져서 100% 국산 검은콩을 정성껏 볶았다는 제품을 주문했다. 수백 개의 리뷰가 말해주듯 배송된 검은콩은 과연 고소했다. 콩은 잘못이 없다. 너무나 부지런히 먹은 내가 잘못이다.


5년 전 검은콩가루 과량복용으로 자궁근종을 거대 사이즈로 길러냈던 나는 지난날의 실수는 까맣게 잊고 어느새 나도 모르게 검은콩을 쉬지 않고 씹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이가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조금씩 시큰거리던 이는 급기야 오른쪽으로는 음식을 씹을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딱딱한 콩을 오도독오도독 그렇게 씹어댔으니 이가 성할 리가 없었다. 

치과에 갔더니 어금니에 미세 금이 간 것 같다고 했다. 검어져야 할 흰머리는 도무지 검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애꿎은 어금니만 상했으니 참 민망할 노릇이다. 

이쯤 되니 검은콩이 정말 흰머리에 효능이 있는지 의구심 마저 든다. 흰머리에는 모르겠고 경험상 확실한 건 자궁근종에는 지대한 악영향이다. 그리고 치아에도.....

바로 어금니 신경치료에 들어갔다.


문제는 치과 의자에 누워서 입을 벌린 순간부터 찾아왔다.

"아 하세요"

치료가 시작되자 옆에서 간호사가 부지런히 석션을 함에도 불구하고 침이 자꾸만 목구멍으로 넘어가려고 했다. 그 사실을 한 번 의식하고 나자 내 신경은 온통 목구멍을 자극하는 침에 가있었다. 

치아를 갈아내는 소름 끼치는 소리도 전혀 날 긴장시키지 못했다. 오로지 내 목젖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침이 날 긴장시켰다. 시원하게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싶은데 입을 크게 벌리고 있으니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참다가 도저히 안 되겠어서 난 최대한 치료에 방해가 되지 않게 침을 삼켜보려 했다. 입을 벌린 채로도 침을 삼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 일이 실패로 돌아가고 나자 갑자기 공포감이 밀려들었다.  내 몸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을 때 밀려드는 공포였다. 

오래전 출근길 만원 버스의 한가운데에서 느꼈던 공포와, 그리고 더 오래전 피부숍에서 석고팩을 콧구멍을 제외한 온 얼굴에 덮었을 때 느꼈던 공포와 비슷했다. 

만원 버스에서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겨우 기다시피 내려 상가 화장실로 뛰어들어가 다 토했던 기억이 있고, 마사지를 위해 덮었던 석고팩은 굳기도 전에 내 손으로 허겁지겁 떼어내고 숨을 몰아쉬었던 경험이 있다.  

일명 페소 공포증과 같은 그것이 쾌적한 치과 의자에 누워있는 그 순간에 내 온몸을 지배했다. 급기야 손바닥에 식은땀이 나는 지경에 이르렀다. 머리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게 느껴졌고 현기증이 나려고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런 경험이 여러 번 있었던 터라 나름대로의 대처방법도 있었다. 난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사랑하는 가족들을 생각했다. 

'별일 아니야, 괜찮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난 속으로 되뇌었다. 

'난 지금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병원의자에 앉아있어.'


그냥 의사에게 손 한 번 들어 보이고 

"저 침 좀 삼키겠습니다." 하면 될 것을, 극도로 소심한 성격에 말도 못 하고 목구멍에 고이는 침과의 전쟁에 돌입했다. 긴장한 탓에 주먹을 꼭 쥐었더니 의사는 

"아프면 왼손을 드세요."

라고 했다.

아픈 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애도 둘씩이나 낳았고 거대근종으로 자궁도 적출한 마당에 아픈 건 겁나지 않았다. 그저 자꾸만 목구멍에 고이는 침이 날 힘들게 했다. 잠시 의사가 내 입에서 기구를 빼고 몸을 돌리는 틈을 타 잽싸게 침을 삼켰다. 

40여 분간 계속된 치료에 온몸의 진이 모두 빠진 기분이었다.

그 후 대여섯 번 더 진행된 치료에 난 치과에 갈 때마다 전장에 나가는 전사의 마음으로 마음을 다스려야 했다.

참 세상 살기 힘든 성격이다. 


결국 어금니에 크라운을 씌우고 집으로 돌아와 나는 염색약을 꾹꾹 짰다. 비닐장갑을 끼고 잘 섞은 염색약을 머리에 처덕처덕 발랐다. 역시 흰머리에는 염색이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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