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만의 인플레이션도 깨지 못한 일본의 30년 디플레이션
경제 용어로 ‘잘라파고스’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일본을 뜻하는 재팬과 남미 쪽 작은 섬 갈라파고스의 합성어입니다. 갈라파고스는 대륙에서 멀리 떨어져 고립돼 있어요. 대륙과 별개로 독자적인 환경에 따라 동식물들이 진화했습니다. 같은 종의 생물이라도 환경에 따라 어떻게 진화할 수 있는지 비교 연구가 가능하죠. 찰스 다윈의 ‘진화론’ 이론에 많은 영감을 줬습니다.
잘라파고스란 단어는 2000년대 이후 회자됐습니다. 전세계 유행이나 표준과 상관없이 일본 혼자서 고립돼 있다는 뜻으로 정착됐습니다. 한 예로 음반 시장을 들 수 있습니다. 1990년대말 MP3가 등장하고 전세계 음원 시장은 이미 '온라인 다운로드' '온라인 스트리밍'이 대세가 됐음에도 일본인들은 CD를 삽니다.
전자제품에서도 이 같은 경향이 나타났어요. 1980년대 ‘워크맨’으로 전세계적인 성공을 거뒀던 소니가 1990년대말 ‘MD’를 들고 나왔어요. CD보다는 조금더 고차원적이긴 합니다만, 온라인 음원 유통과는 좀 거리가 있었습니다. 일본에서만 통하고 일본에서만 쓸 수 있는 서비스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음악 제작자 등 마니아 층에서 쓰긴 했습니다만, 대중적으로 보급되는데는 실패했습니다.
이런 잘라파고스의 예는 또 있습니다. 바로 도장입니다. 여전히 많은 일본 기업이나 관공서에서는 도장을 씁니다. 우리나라는 진작에 전자결제 서비스로 바뀌었는데 말이지요. 같은 맥락에서 일본 관공서에서는 팩스와 플로피디스크를 쓰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 차원에서 플로피디스크 사용을 중지하자는 캠페인을 벌일 정도였습니다.
이런 잘라파고스 현상은 일본인들 특유의 완고함도 있겠지만, 일본 시장이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내수시장이기 때문입니다. 구매력 좋은 소비자들로 구성된 세계 3위 경제대국의 내수시장이다보니, 굳이 힘들게 다른나라 사람들을 위한 제품을 만들 필요가 없는 것이죠. 어느샌가 세계시장 표준, 혹은 유행과는 동떨어져 일본만의 고립된 문화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잘라파고스 현상은 최근의 인플레이션 상황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미국만 해도 40년만의 인플레이션에 기준금리를 0.75%포인트 연달아 인상하는 등 ‘자이언트 스텝’을 단행하고 있습니다. 2010년 유럽재정위기 이후 디플레이션 상황에 놓였던 유럽 국가들도 기준금리 인상에 나서고 있어요. 영국 중앙은행 영란은행이, 유로존 사용국가의 중앙은행인 유럽중앙은행이 0.5%포인트씩 기준금리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일본은행만큼은 이 같은 흐름에서 완전히 벗어나있습니다. 경제구조가 비슷하다는 우리나라에서마저도 금리인상을 시급하게 하고 있는데 말이죠.
이유는 간단합니다. 30년 넘게 디플레이션 상황에 빠져있다보니 최근의 인플레이션 문제가 그리 심각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란 점입니다. 지난 8월 기준 미국은 8.3%, 영국 8.6%, 이탈리아 8.4%의 물가상승률을 기록했어요. 캐나다가 7.0%, 한국이 5.9%인데 일본만은 3.0%입니다.
물론 일본 정부의 펜데믹 규제 완화가 다른 나라보다 늦었고 일본내 경기회복이 본격화되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바로 디플레이션에 있습니다. 30년 넘게 시달리다보니 기업도 소비자도 그것에 특화된 것입니다. 기업은 가격 올리기를 극도로 회피하고 소비자들은 가격 인상을 싫어합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섣불리 제품 가격 인상에 나섰다가 시장에서 퇴출될 수 있습니다.
손해를 보면서 팔게되면 기업은 매출이 줄고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걱정하게 됩니다. 소득이 늘지 않다보니 가격 인상에 거센 저항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디플레이션의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죠.
일본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은 1990년대 이후 눈물겨운 노력을 했습니다.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입니다. 기준금리를 낮췄고 1995년 이후에는 0.5% 이하로 유지했습니다. 2000년대 이후로는 제로금리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경제 교과서적으로 보면 기준금리를 이렇게까지 낮추면 경기는 살아나야 합니다. 저렴한 금리에 대출이 늘고 부동산과 주식 시장에 자금이 흘러가게 되죠. 기업들은 저리 자금을 가져다 투자를 하게 됩니다. 지난 2020년 한국을 보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1945년 해방 이후 처음으로 한국은행은 기준금리를 0.5%로 낮췄고 주식과 부동산 시장은 전례없는 급등 분위기를 보입니다.
1980년대 거품경제를 맛본 일본 내수시장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기준금리 인하 초강수도 약발이 다된 것이었죠. 이에 일본은행이 특단의 조치를 취합니다. 2016년 기준금리를 아예 마이너스로 내린 것입니다. -0.1%입니다.
예금자가 돈을 은행에 넣으면 보관료까지 함께 지급해야하는 상황입니다. 예금보다 대출이 훨씬 유리한 상황까지 만든 것이고요. 여기에 '10년만기 국채 수익률 0%' 목표를 세웁니다. 화끈한 양적완화(시중의 채권을 중앙은행이 매입해 통화량을 늘림)로 시중 통화량을 늘리겠다는 목표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통화량의 증가는 통화 가치의 하락으로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일본 엔화를 시장에 마구마구 뿌려 일본 엔화의 가치를 떨어뜨려 인위적인 인플레이션을 만들어내겠다는 의도입니다.
문제는 엔화 가치, 즉 환율입니다. 엔화 자산을 갖고 있는 외국인 입장에서 엔화 가치 하락은 결코 반가운 상황이 아닙니다. 엔화 가치가 50% 줄었다면(1달러에 100엔 하던 게 1달러에 150엔 한다면) 가만히 있어도 그 투자자의 자산은 줄어들게 됩니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엔화자산보다는 달러 등 다른 자산을 찾겠죠. 엔화 가치의 폭락이 초래될 수도 있습니다.
엔화 가치를 떨어뜨리는 게 목표긴 하지만 폭락은 일본 경제에 결코 좋지 못합니다. 자원의 대부분을 수입하는 일본 국가 경제에서, 환율 급등은 일본 국민들의 생활 수준 하락을 의미하니까요. 자칫 국민들이 크게 반발할 수도 있습니다. 지난 30여년간 일본 국민들의 실질 소득이 크게 오르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국민들의 삶은 더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일본 정부는 더 방조하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일본인들이 인플레이션의 충격을 받아 물가에 예민해지길 바란다는 점이죠. 일본 노동자들이 기업에 급여 인상을 요구하게 되고 이는 일본 국민들의 소득 증가로 연결되고, 소득 증가에 따라 내수 경제가 회복하고 디플레이션을 타파할 수 있다는 '작은 소망'이 깔려있는 듯 합니다.
과연 이런 일본의 시도가 어느 정도까지 효과를 볼지, 디플레이션에서 과연 벗어날 수 있을지 주목되는 부분입니다. 고질화된 디플레이션에 남들 다 올리는 기준금리 하나 마음대로 못올리는 일본의 현실이 처연해 보이기까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