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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팟캐김 May 09. 2023

세이노와 영웅서사

누구나 자신만의 영웅서사가 있다 

요새 '세이노의 가르침'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 제목부터가 참 거만하게 와닿아 지나쳤던 책이었다. 성현처럼 '가르침'이라고 써놓은 것 자체부터 마음에 안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요새 소리소문 없이 서점가에서 화제가 되고 있던 터라 뒤늦게나마 읽어보게 됐다. 


1990년대 말께 부자가 된 세이노는 1950년대 태생으로 지독하게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고난은 청년 시절까지 이어졌다. 손목을 긋고 자살을 시도할 정도였다고 하니 그때 그의 절망감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이 간다. 



이랬던 그가 청년기와 장년기를 보내면서 미국에서 성공을 거두게 된다. 자세한 얘기는 나오지 않으나 무역업 관련해서 큰돈을 번듯하다. 2000년대 초반 이미 '큰손'으로 한국투자 업계에 소문이 났다. 자산 규모 1000억 원 정도 된다고 하나. 우연히 동아일보 기자와 연을 맺게 된 그는 자신의 생각을 담은 칼럼을 신문에 싣기 시작했다. 20여 년간 그의 글을 엮어 모은 게 바로 '세이노의 가르침'이다. 


이 책은 인세를 전혀 받지 않는다고 한다. 그만큼 세이노가 부자라는 얘기. 이런 이유인지 책값도 싸다. 나도 거의 돈을 내지 않고 이 책을 읽어보게 됐다. 


참, 세이노는 일본 사람이 아니다. 칼럼을 쓸 당시 'Say No'라는 필명을 즉석에서 생각했고 그때부터 써왔다고 한다. 


◇세이노의 지론 


얼마 전에는 CBS FM 김현정의 뉴스쇼라는 시사 라디오 프로그램에도 나왔다. 진행자인 김현정 씨가 직접 세이노를 인터뷰하는 것인데, 이때도 그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마스크와 모자를 썼고, 카메라 각도는 턱 밑을 가리키고 있었다. 


<관련 링크 : ">https://www.youtube.com/watch?v=qlmn2jdy4Qo>


이날 이 방송에서 그는 곽상도 전 의원 아들의 50억 원 퇴직금 무죄 논란에 대해 입을 열었다. 권력에 가까운 사람이면, 혹은 있는 집 자식이면 쉽게 돈을 벌고 죄까지 면할 수 있는 세태를 개탄하는 내용이었다. 본인의 지론, 그러니까 '가르침'과는 크게 어긋나는 내용이라는 뜻. 


세이노의 지론은 이렇다. 재벌 1세대 창업주들의 삶의 여정과도 맞닿아 있는데 '죽도록 해봤냐?'라는 것이다. 어느 한 분야에서 죽기 살기로 승부를 볼 때까지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빛을 본다는 얘기다. '학력이 낮다고, 돈이 없다고, 부모가 변변치 못하다고 원망하지 말고 자기 삶을 개척하라'고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곽상도 아들 같은 사람이 (일반적인 상식에 반(反)할 정도로) 쉽게 돈을 버는 모습은 그가 해온 '가르침'을 모두 휴지 조각으로 만든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권력만 있으면, 아빠만 잘 만나면 돈을 쉽게 버는데, 열심히 살아 뭣하냐'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는 얘기다. 세이노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살아가는 일상 직장인들의 생각이기도 했다. 


◇자기계발서와 영웅서사 


세이노의 가르침은 자기계발서이기도 하다. 화법은 직접적이고 직설적이다. '하기 싫으면 말아라'라는 식이다. '망설이고 고민할 시간에 뭐든 좀 해라'라고 잔소리까지 한다. '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인데 좀 게을러' 식의 다른 자기계발서와는 좀 다르긴 하다. 


다만 저자가 살아왔다는 '삶의 구조'는 여느 자기계발서 저자와 다르지 않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비천한 존재였지만, 불굴의 의지와 약간의 재기로 크게 성공을 거뒀고, 인생 선배이자 멘토로 젊은 독자들에게 '조언하는' 구조다. 성공하는 와중에 그에게 큰 깨달음을 준 멘토가 있었고 혹은 그의 인생을 바꾸는 결정적 계기나 사건이 있었다. 이후 그의 인생은 격정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핵심은 '나는 너보다도 상황이 안 좋은 데도 이겨냈다. 너도 할 수 있다'가 된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자기계발서에 나온 저자들의 삶이 고대로부터 내려온 영웅서사와 맞닿아 있다는 점이다. 아무것도 갖지 못한 흙수저로 태어나서 주변의 시샘과 방해를 받고, 엄청난 시련을 신으로부터 받게 된다. 그 시련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도움이 되는 누군가를 만난다. 덕분에 시련을 이겨내고 영웅이 된다고 돼 있다.

 

이런 영웅서사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게 아니다. 인간이 살아온 거의 모든 사회 양식에 뿌리 깊게 박혀 있다. 중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역사소설 삼국지연의도 이 같은 구조이고 한국의 고전 영웅소설 홍길동전도 마찬가지다. 고귀한 혈통을 타고났지만 어떤 비극적 사건으로 비천한 처지에 놓이게 된 주인공이 시련을 이겨내고 영웅이 된다. 그 와중에 많은 이들이 그를 조력하며 따른다. 


물론 상당수 영웅들은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다. 운명을 거스른 죄과라고 할까, 그리스 신화에는 인간이 넘을 수 없는 '모순'에 따라 최후를 맞는 영웅들의 모습이 여럿 그려진다. 헤라클레스가 대표적이고, 아킬레우스도 한 예가 된다. 유한한 삶의 인간이 신만 누릴 수 있는 '영웅적 지위'를 탐냈던 결과라고 할까? 


현대의 자기계발서 저자들은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들 자체가 그들이 만든 신화의 주인공이자 저자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다고 하지만, 그들의 최후는 '미래 언젠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반면 고대 신화의 영웅서사는 수많은 음유시인들이 저자이고 수 천년을 내려오면서 '개작의 개작'을 거듭했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과 사회 속에서 구전되어 오면서 여러 가지가 가미됐을 것이고. 짓궂은 누군가가 비극적 결말을 뿌려놓았을지도 모른다. 


◇영웅서사가 위안을 주는 이유 


지금처럼 자기계발서 등의 책을 접할 수 없던 수백, 수천 년 전 사람들에게 있어 영웅서사는 자기계발서일 수도 있지 않을까. 오늘날 서점에서도 진중하게 읽혀야 하는 전공·수험·인문 서적과는 별개로 자기계발서는 좀더 대중적인 듯하다. 많이 읽혀야 하고 많이 팔려야 하니까. 특정 집단을 타깃으로 한 책이 아니고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책인 셈이다. 


대상도 젊은 누군가이다. 서점가에서 자기계발서를 들고 있는 사람들은 사회 초년생인 경우가 태반이다. 수십 년 자기 인생을 살아오면서 자기 주관과 자기 고집이 단단히 다져진 장년 및 노인들과 자기계발서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 


영웅서사도 비슷하지 않을까. 옛 젓 호롱불 밑에서 할머니가 해주시던 '애기장수' 설화 얘기를 듣던 사람들도 아이들이었을 것이고, 시장 이야기꾼이나 음유시인 앞에는 어린아이들이 앉아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쉽게 할 수 있다. 영웅적 일대기를 들으면서 '나도 열심히 살면 그(영웅)처럼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수 있고. 반대로 말하면 '내가 게을러서' 성공하지 못한 게 된다. 전형적인 지배층 논리. 


그러면 여기서 잠깐. 영웅서사의 주인공이나 자기계발서의 저자, 드라마나 영화의 주인공은 천편일률적이다 싶을 정도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것일까. 본인들만의 고생이야말로 '찐'인 듯싶을 정도다. 어떻게 보면 '누가 더 고생했는가' 경쟁하는 것 같다. 


'누가 더 고생했는가'에 대한 경쟁. 이거 어디서 많이 본듯하지 않은가? 그렇다. 술자리다. 남자들끼리 있다면 군대에서 고생한 얘기가 경쟁적으로 나오고, 직장인들끼리 모여 있다면 초년생 때 고생했던 얘기가 경쟁적으로 나온다. 누군가는 자신을 구박했던 선임을 욕하고, 또 누군가는 자신을 괄시했던 선배에 대한 험담을 한다. 또 다른 누군가는 자신을 버티게 해 줬던 은인에 대한 얘기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영웅서사와 비슷하지 않은가? 누군가에게는(대부분 부모) 고귀할 수밖에 없는 '나 자신'이 어떤 조직의 막내로 들어와 무지막지한 고생과 시련을 겪고, 서서히 적응해 가면서 '한 사람의 몫'을 감당하고 조직에서 인정받게 되는.... 


이후의 나는 '라떼는 말야'를 시전하며 자신만의 영웅서사를 동료와 후배(!)들에게 말한다. 고대 영웅서사도 처음에는 이렇게 시작해 구전되면서 거대한 서사를 이뤄가지 않았을까?  


그런 '나'가 현대에서는 1000억원대 자산가가 되거나 혹은 유명 명사가 되어 책을 쓴다면 자서전이 되고, 좀 더 많이 팔기 위해 서사 구조를 '가르침' 형태로 바꾼다면 자기계발서가 되는 것이고. 


또 한 가지. 어느 사회나 어느 시대나 막내들의 삶은 고달프고 힘들기 마련이다. 재벌집 막내아들도 그들 패밀리 안에서는 힘들 것이다. 홀로 방에서 슬피 우는 날도 있을 것이고. 육체적으로 편한 인간도 정신적으로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 인간이니까. 


부모나 선배가 대신 공감해주지 못하는 '자신만의 고통'을 영웅서사나 자기계발서에 나온 영웅·저자의 얘기를 보고 들으면서 위안을 얻는 것이고... 현실은 변할 게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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