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 다행이었다
지난 7월 18일이었다. '금리는 답을 알고 있다'라는 책이 나온 지 한 달 정도 되는 시간. 달란트경제라는 유튜브 채널에 출연하기로 약속돼 있었다. 출판사가 애를 써준 덕분에 할 수 있게 된 출연이었다. 그간 유튜브에는 여러 번 나왔고 생방송 라디오도 땜빵으로 여러 번 나왔지만 구독자 수십만의 유튜브 채널 출연은 처음이었다.
촬영 장소 근처 스타벅스에서 일찌감치 자리 잡고 앉아서 대충 나눌 얘기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러던 즈음 전화가 왔다. 모르는 휴대본 번호였다. 받았는데 자신을 대행사 직원이라고 소개했던 상대방은 강연에 나와줬으면 좋겠다고 얘기를 했다. 아직 책이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상태였는데, 꽤 큰 규모의 강연이라니...
강연이야 나가는 것은 어렵지 않겠으나, 두 가지가 부담이었다. 첫 번째는 여의도에서 금융사 직원이나 금융사 입사 희망자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강의 시간이 넉넉 잡아서 90분이라고 했다. 초등학생 앞 50분 정도 저널리즘에 대한 강연을 한 적은 있어도, 금융 분야를 놓고 금융사 직원 앞에서 90분을 말하려니 숨이 막혔다. 내가 할 수 있을까.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강연 시간. 두 달 정도의 준비가 가능했다. 9월 22일이었던 것. '내가 할 수 있을까?'라고 고민했고 10분 만에 수락 메일을 보냈다. '그냥 저질러보자'였다.
5년 넘게 해 왔던 팟캐스트 녹음도 중단한 지 1년이 넘었고, 대중 앞에서 말을 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실시간으로 여러 많은 사람들의 눈을 봐가면서, 그들의 반응을 느껴가면서 내 생각을 일목요연하게 말해봤던 적이 별로 없었다는 얘기다.
언제 내가 이것저것 따져보고 했던가... 그냥 하자라는 생각을 했고 그때부터 준비했다. 내용부터 구성까지.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다. 7월 18일 유튜브 녹화가 만족스럽지 못했다는 점. 말을 하다가 끊겼고, 제대로 풀어나가지 못했다고 봤다. 쉽게 말해 말을 잘하지 못했었다. 급히 '크몽'을 깔고 스피치 수업에 대해 알아봤다. 이대로라면 90분 아무것도 못하고 나올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일단 하겠다고 수락했으니,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는가. 로드맵을 짰다. 책 내용을 토대로 들으러 온 사람들이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게 할 필요가 있었다. 7월 말까지 대본 겸 원고를 만들고 8월 둘째 주까지 PPT를 완성하기로 계획했다. 그래도 불안했다. 전문 강연자가 아니었으니까. 경험도 거의 없었고.
그러다 우연하게 김창옥 교수의 강연을 유튜브를 통해 들었다. 김창옥 교수가 누구던가. 강연 업계에서는 스타의 반열에 오르신 분이 아니시던가. 재미와 감동을 동시에 안겨주는 유명인이었다.
그가 했던 말 중 하나 기억나는 것 하나. 관객에게 항의를 받았는데, '왜 일전에 했던 말을 왜 또 반복적으로 하느냐'라고. 강연자에게는 딜레마일 수 있는데, 사실 많은 강연자들이 했던 말을 반복하면서, 앞서했던 내용을 또 하는 게 비일비재했다. 늘 다른 내용으로 하기란 쉽지 않다는 얘기. 다시 말하면 그들이 말을 잘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만큼 반복숙달적으로 같은 내용을 해왔다는 얘기다. 관객들의 반응을 보고 괜찮았으면 다음번에 더 효과적으로 써먹는 것이고.
또 한 가지. 종편 출연자로부터 들었던 얘기가 생각났다. 가량 어떤 이슈가 나오고 그 이슈에 대해서 잘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방송에 나가게 되면 웅얼웅얼 서투르게 말을 할 수가 밖에 없다. 여러 차례 하면서 생각이 다시 정리가 되고, 다른 출연자와 얘기를 하면서 생각이 정리된다. 저녁때 정도 되면 유창하게 그 이슈에 대해 분석하고 전망까지 한다.
결국 방법은 계속해서 PPT를 보면서 연습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 PPT가 완성되는 이후부터 내 개인만의 리허설을 하기로 했다. 물론 처음 할 때는 절망적일 정도로 말을 끌었고 더듬거렸다. 두 번째 할 때는 조금 나아진 게 느껴졌다. 세 번째 할 때는 덜 떨 수 있게 됐다. 그렇게 열 번 넘게 했을까. PPT도 수정을 하면서 최적의 이야기 스토리를 만들려고 했다.
사실 나를 아는 주변 지인들도 내가 90분 강연을 한다고 들었을 때 '제가 과연?'이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내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는 경우가 많지 않고, 말을 길게 잘하는 편도 아니니까. 더더욱 반복적으로 얘기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무척이나 부담스럽고 피하고 싶었던 22일이 왔다. 뇌 속의 '말하는 기능'을 담당하는 기관이 있다면 최대한 각성시키기 위해 커피를 연거푸 마셨다. 그리 겁을 낼 정도로 부담스럽지 않다는 느낌도 올라왔다.
늘 하던 데로 첫발을 떼고, 그다음 발을 나아가면서 걸어 나가듯 얘기를 풀어나갔다. 다행히 들으러 오신 분들의 표정도 좋았다. 자발적으로 내 강연을 듣고 싶어서 온 분들이라고 주최 측으로부터 들었던 터라 안심도 됐다. 앞선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서 얘기를 하는데, 문득 버벅거리지 않고 말을 잘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듣는 이들이 어떻게 뭘 느끼는지를 떠나, 내가 목표로 했던 '끊기지 않는 말하기'가 자연스럽게 되고 있었다. '이 정도면 꽤 할 만한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PPT 슬라이드 3장 정도까지는 약간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지만 본론으로 들어갔을 때, 실없는 농담에 웃는 그들의 모습에 마음이 놓였다. 중간에 '폴 볼커'라는 전 연준 의장의 이름을 까먹는 실수를 하긴 했다. 그때도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제 아들 이름도 자주 까먹어요'라면서 준비해 왔지만 한 번도 보지 않았던 원고에서 그의 이름을 찾아서 되뇌었다.
강연 시간은 70분 정도였다. 질의응답 시간과 싸인까지 포함해서 90분 정도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10분 정도 남았다는 주최 측의 사인을 보면서 '이제 됐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 하지 못했던 얘기를 하면서 10분을 보냈다.
질의응답이 예상외로 길어져서 사인을 받겠다고, 사진을 같이 찍겠다고 남았던 사람들은 5명 안팎이긴 했다. 와,, 나한테 사인을 받겠다니. 어떤 분은 기념사진까지 찍어갔다. 늘 질문만 하고, 유명인의 뒤를 쫓던 내게 있어 정말 생경한 경험이었다. 조금 더 잘하고 싶어 졌다는 생각이 들었고.
운동선수가 가장 크게 성장하는 때가 큰 대회를 치른 후라고 한다. 축구 선수라면 월드컵이 되겠고, 운동선수라면 올림픽 등이 될 것이다. 월드컵이나 올림픽에 갈 정도라면 이미 국내 최고 수준인데, 거기서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되는 것이다. 물론 그는 수많은 대회를 치러 오면서 성장을 해왔던 것이고.
9월 22일 마음 졸이면서 부담스러워했는데, 막상 그때가 지나고 나니 홀가분하다는 점이 너무나 크게 느껴진다. 뭔가 더 잘하고 싶어 졌다고나 할까.
3권의 책을 쓰면서, 공부를 더 하고 싶어 졌다면, 이번 강연을 통해서는 더 성장하기 위해 평소에도 '꾸준함'을 유지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튜브 등을 통해 나만의 강연을 계속해서 만들어가는 식이다.
10년 뒤의 내 인생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어제 느꼈던 소중한 경험을 잊지 않고, 꾸준하게 실천한다면 또 극적으로 바뀌어 있지 않을까 싶다. 7년 전 팟캐스트를 만들면서 '아마도 뭔가 바뀌어 있겠지'라고 기대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