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21대 대통령이 된 이재명. 그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주요 요인은 무엇일까? 그는 어떤 점이 달랐기에 1970~80년대 운동권의 대부 김문수를 물리칠 수 있었고, 그 전에 더불어민주당 대표로 전무후무한 총선 승리를 이끌어낼 수 있었을까? 대통령이 그의 운명이었을까?
개인적으로는 이재명 본인의 뛰어난 지능, 즉 학습 능력을 들고 싶다. 공부도 재능이라고 한다면 그 재능만큼은 탁월했다. 그는 중고등학교를 다니지 않고 검정고시를 통해 대학에 진학했다. 그가 입학한 중앙대는 지금도 이름난 명문 대학이지만 1980년대에는 더 명문으로 평가 받았다. 이런 명문대를 검정고시 이후 학력고사만으로 입학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탁월한 학습 능력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윤석열 전 대통령이 입학한 서울대 법대보다 낮게 평가될 수 있다. 만약 이재명 대통령이 청소년기에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었고 집안의 전폭적인 지원이 따랐다면 서울대 법대 입학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본다.
현재의 이재명을 있게 한 결정적 요소는 ‘사법고시’였다. 당시 가난한 청년들에게는 사법고시가 유일한 출세의 길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이재명도, 윤석열도 모두 사법고시 합격 이후 법조인의 길을 걸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평범한 동네 아저씨로 살아갔을지도 모른다. 이 하나의 시험이 사회 지도층으로 진입할 수 있는 관문이었던 셈이다.
두 번째는 그만이 갖고 있는 ‘서사’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특히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국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고졸 출신 변호사로 ‘바보 노무현’이라 불릴 정도의 서사를 가졌다. 지역주의 타파는 그의 상징과 같았다.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은 독재정권에 맞섰던 투쟁 서사가 있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사원에서 사장까지’의 성공 스토리가, 박근혜 전 대통령은 ‘박정희의 딸’이라는 막강한 후광에 ‘선거의 여왕’이라는 타이틀이 있었다. 국민들이 그를 지도자로 뽑아줄 그 이유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게 서사다.
이재명 대통령에게는 ‘소년공 출신 인권변호사’라는 강한 서사가 있다. 그는 프레스기에 손목이 눌려 장애를 입었고, 자살을 시도할 만큼 절망적인 시기를 겪었다. 이 이야기는 수천 년을 이어온 ‘영웅서사’ 구조와 닮아 있다. 특별하게 태어난 아이가 고된 환경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은인을 만나 성장하며 영웅이 된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런 서사는 누구에게나 있을 법하다. 누구나 어려움과 스트레스를 이겨내며 어엿한 인격체로 성장해 나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재명에게는 ‘인권변호사’라는 타이틀이 더해져 주목도가 높아졌다.
시대도 그를 도왔다. 제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고 해도 시대를 잘못 만나면 필부로 끝난다. 혹은 역적이 되어 집안 자체가 멸족되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이런 경우를 수도 없이 볼 수 있다. 시대가 도와야 영웅의 탄생도 가능하다.
이재명 대통령은 묘하게 모바일 시대와 겹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인터넷 시대에 맞물려 대통령으로 당선됐던 사례와도 비슷하다. ‘바보 노무현’ 서사가 우리 국민들에게 폭넓게 알려진 건 2000년대 초 인터넷이 보급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의 이야기는 신문과 방송 등 매체를 통해 알려지긴 했지만, 폭발적으로 퍼지게 된 것은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서였다.
다양한 사람들의 글이 빠르게 퍼져나갈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면서 노무현이라는 인물이 알려졌다. 자발적인 시민들의 선거운동으로까지 이어졌다.
이재명 대통령이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던 시기는 모바일을 중심으로 한 ‘쌍방향 실시간 소통’의 시대였다. 2000년대가 인쇄 매체에 의존하지 않고도 다채로운 정보가 빠르게 확산된 시대였다면, 이재명이 알려지기 시작한 2010년대는 실시간 소통의 시대였다. 정치인이 직접 지지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시대, 스스로 팬덤을 만들어갈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2010년대도 주류 정치인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 등을 활용했다. 그러나 SNS는 주류 정치인들에게는 보조적인 수단이었다. 메인은 방송과 신문이었다.
이재명은 달랐다. 그는 처음부터 유명하지 않았다. 성남시장으로 시정 활동을 하면서 SNS를 적극 활용했고, 자신의 소신을 거리낌 없이 드러냈다. 같은 성과를 내더라도 이를 드러내는 사람의 성과가 더 부각되는 것처럼, 이재명은 성남시장에서의 성과를 적극적으로 알렸다.
그가 얼마나 SNS에 공을 들였는지는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과의 일화에서 잘 드러난다. 2014년 세월호 집회가 광화문에서 열렸을 때, 당시 원내대표였던 박영선 의원 옆에 앉은 성남시장 이재명은 스마트폰을 이용해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올라온 질문에 답하고 ‘좋아요’를 눌렀다. 주류 언론이 자신에게 관심을 주지 않을 때 자신을 지지해 준 사람들에게 보인 고마움의 표시였다.
그렇게 쌓인 신뢰가 그의 팬덤이 되었다. ‘개딸’ 현상도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또 하나가 있다면 ‘비주류 정신’이다. 이재명은 애초부터 비주류였다. 사회 기득권과도 거리가 멀었다. 교복조차 입지 못한 채 공장에 다녀야 했던 그의 삶은 ‘비주류’ 그 자체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가 가진 주류에 대한 인식이다. 단순한 반감이 아니라, 저항과 항거로 표출됐다.
성남시장 시절 국정감사장에서도 그는 보수 정당 정치인들, 즉 주류 정치인에게 거침없이 맞섰다. 주눅이 들어 있던 다른 지자체장들과 달리 그는 할 말을 했다. 이러한 모습은 진보 지지층에게 ‘사이다’처럼 통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한국 사회에는 묘한 정서가 있다. 핍박받는 약자에 대한 동정심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문재인 정부 시절 검찰총장에서 전국적 보수 진영의 희망으로 떠오른 것도 추미애 당시 법무부 장관과의 갈등 덕분이었다. 민주당 정치인에 맞서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 김문수 전 국민의힘 대선 후보도 떴다.
이런 흐름은 정치뿐 아니라 프로레슬링 같은 대중 콘텐츠에서도 통한다. 강자에게 핍박받는 약자가 끝내 굴복하지 않고 맞서는 서사 말이다. 실제 프로레슬링에서도 신인을 띄우기 위해 기존 챔피언에게 도전시키는 각본이 자주 사용된다. 비록 패하더라도 대중에게 강하게 각인된다.
그런 점에서 이재명은 ‘잘 싸운’ 정치인이었다. 대통령이 되기 전 그의 싸움 상대는 윤석열이었다. 오만과 불통의 상징이 된 윤석열과 대립하며 그는 지지층을 결집시킬 수 있었다. 윤석열의 오판이 결과적으로 이재명을 도운 셈이기도 했다. 2024년 총선 참패 후 윤석열이 계엄이 아닌 개헌을 선택했더라면 어땠을까. 국회라는 정치의 무대를 경험해보지 못한 윤석열이 이재명의 상대였다는 것 자체가 이재명에게는 행운이었다.
정리하자면, 이재명은 가난했지만 똑똑했다. 결정적인 것은 1980년대 사법고시를 통과하며 ‘선택받은 소수 엘리트 집단’에 들어갔다는 점이다. 그 안에서도 그는 주류보다는 비주류를 택했고, 기득권에 맞서는 태도를 보였다. 그에 대한 서사는 그렇게 완성됐다.
시대도 그를 도왔다. SNS를 통해 지지자들과 직접 소통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정치 기반을 만들어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대통령이 되는 순간 ‘화룡점정’처럼 윤석열이라는 존재가 있었다. 그가 만약 계엄을 두달 정도만 미뤘더라면, 혹은 그전 2024년 총선 직전 자충수를 두지만 않았더라면 두 사람의 운명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정치인 이재명은 국민들이 키웠지만 대통령 이재명은 윤석열이 만들었다’라는 말에 적극 공감한다. 나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어떤 ‘운대’를 타고나는가도 무척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이재명 대통령에는 천운이 따랐다.
에필로그
이재명 대통령의 당선이 확실시 되던 2025년 6월 3일 밤 11시가 되도록 회사는 대통령실 출입 기자를 결정하지 못했다. 해왔던 관례대로라면 야당에서 여당이 되는 민주당 반장이었던 내가 올라가는 게 당연했다. 허나 국장과 부장은 며칠을 고민했다. 대통령실이라는 중차대한 출입처에 ‘나’란 존재를 박아 놓는 게 못 미더웠을 수 있고, 10년 넘게 경제·산업기자로 커리어를 이어왔고 유튜브를 시켜놓아도 할 수 있는 나를 2년 가까이 대통령실에 묻어 놓는다는 것이 아까웠을 수 있다.
결국 밤 11시 15분이 되어서야 ‘Go 대통령실’로 결론이 났다. 이재명 대통령이 업무를 시작하는 바로 다음날부터 대통령실로 출근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때마침 거대한 카톡방에 내가 갇히게 됐다는 것을 알게 됐다. 민주당 출입 반장(팀장)들로 구성된 예비 대통령실 출입 기자방이었다.
그 안에 대통령실 출입을 위한 여러 가지 정보와 사항이 공지됐다. 국회 소통관 내 부스를 다 정리하지 못한 상태에서 대통령실 임시 출입증부터 만들어야 했다.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볶아먹는 식’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인수위원회 없이 시작하는 대통령실의 업무가 대부분 ‘번갯불에 콩 볶아 먹는 식’으로 진행된다는 것을... 국방부 내 대통령실을 출입하는 임시 출입증이 마련되고 설로만 돌던 G7 정상회담에도 가게 됐다. ‘설마하니 정부가 꾸려지고 2주도 안되어 그런 외교 일정을 소화할까?’ 그런데 진짜로 G7 정상회담은 성사됐고 캐나다로 떠나게 됐다. 한줌 남은 대통령실 직원들이 전력을 다해 준비했던 덕분이라고 본다.
비행기 안에서, G7 정상회담을 오가는 근거리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진심으로 대통령을 잘하고 싶구나’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는 망설이거나 그 순간을 즐기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대통령실 내 조직이 완비되는 것을 기다리지 않았다. 행동부터 시작했다. 덕분에 그를 따랐던 비서실장, 대변인, 안보실장 등이 한달도 안돼 ‘팍팍’ 늙는 게 눈에 보였다. 동시대 나이대 남성들과 비교해 꽤 젊어 보였던 강훈식 비서실장도 의원 때와 달리 대통령 비서실장이 되어서는 ‘폭삭’ 늙어 있는 게 보였다. 위성락 안보실장은 해외 출장 중에 코피를 쏟았다.
대통령실 늘공(계속 공무원)이던 사람들도 윤석열 시대와는 분명 다르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또다른 한 시대가 열리는 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