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가 성숙 단계에 이르면 성장률은 낮아집니다. 달리 말하면, 똑같은 양의 자본·노동량 등을 투입한다고 했을 때 저개발 국가와 선진 국가의 성장률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건 이렇게 비유할 수 있습니다. ‘냄비의 물은 휴대용 가스 버너로도 금방 끓일 수 있지만, 세숫대야나 욕조의 물은 그렇지 않다.’
이런 때에는 자본·노동량 등의 투입 효율성을 올리는 ‘기술’이 중요해집니다. 실리콘밸리를 품은 미국의 성장률이 한국이나 유럽 국가들보다 높은 것, 중진국 대열에 들어서는 중국이 첨단 기술 개발에 집중하는 게 여기에 있습니다. 이재명 정부가 인공지능(AI) 등을 강조하고 연구·개발(R&D) 예산을 늘려잡은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자본·노동량의 투입에 한계가 있을 때 기술이 GDP 성장률을 높여주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으니까요.
여기에 수출입이 GDP의 규모를 키워줍니다. 내수 시장이 상대적으로 적고 자본량마저 부족했던 한국의 성장 전략이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20세기 식민지 경험이 있는 나라 중 유일하게 21세기 선진국 대열에 발돋움했습니다. 아직 1인당 소득이 3만 달러 중반에 있다고는 하지만, 전 세계적인 영향력을 놓고 봤을 때 한국은 ‘강한 나라’임에 틀림없습니다.
아쉬운 점은 최근 전 세계 무역 상황이 악화되면서 수출 성장에 한계를 맞았다는 점, 내수 경기가 든든하게 뒷받침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일본 경제가 30년 불황에 정부 부채가 200%를 넘어도 버틸 수 있는 게 인구 1억 2000만 명의 국내 시장인데, 한국은 인구나 국토 면적으로 봤을 때 일본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냄비 속 물이 더 빨리 식는 것처럼, ‘선진국 한국’의 경기도 빨리 식는 듯합니다.
GDP를 이루는 경제 주체 중 그나마 남은 곳이 정부입니다. 서구 선진국과 달리 정부 부채 비율이 50%를 막 넘은 터라 경기 부양에 쓸 수 있는 ‘실탄’의 여유가 아직 있습니다. 물론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기축통화국이 아니기 때문에 정부 부채 비율을 최대한 낮게 유지해야 한다’라는 주장이 강했지만, 최근에는 우선순위에서 분명 밀려나 있는 것 같습니다.
당현히 지금 정부는 지출을 늘리고자 합니다. 전통적으로는 도로나 항만, 댐 등의 사회간접자본에 큰 공사를 일으켜 민간에 들어가는 자금의 규모를 늘립니다. 극단적인 시도 중 하나로 이명박 정부의 ‘한반도 대운하’를 들 수 있습니다. 비현실적인 계획으로 무산됐지만, 기본 전제는 ‘토목에 지출을 늘려 경기를 살린다’였습니다.
그런데 이 방법은 효과가 뒤늦게 나타납니다. 경부고속도로가 활발하게 이용되기 시작된 시점은 완공 후 3~4년 뒤였습니다. 이럴 때 즉각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게 ‘국민들 호주머니에 돈을 넣어주는 것’입니다. 물론 경제학자들, 특히 고전학파라고 불리는 학자들이 질색하는 정책입니다. 신자유주의 이론으로 무장한 경제 관료들도 되도록 피하려고 하는 방법입니다.
윤석열 정부가 재정 투입을 꺼렸던 이유도 이런 의견을 가진 이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수는 펑크가 나면서 재정 상황을 더 악화시켰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상태’가 된 게 한계였죠.
이재명 정부는 ‘뭐라도 하자’라는 생각에 입각해 적극적인 재정 정책을 펼치는 것으로 보입니다. 국민들에게 현금을 지급하는 정책은 단기적으로 국민들의 소비를 촉진합니다. 이게 경기 마중물로 내수 시장 내 ‘화폐의 순환 속도’를 높이는 승수 효과를 기대하는 것이죠. (정부의 재정 투입에 대한 승수 효과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견해가 다른 것도 사실입니다.) 잘 알려진 케인즈학파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내용입니다.
허나 반론도 있습니다. 장기적으로는 경제성장률 상승에 ‘효과가 없다’라는 생각입니다. 흔히들 고전학파라고 얘기하고 신자유주의 경제 철학으로 보기도 합니다. 이 생각의 골자는 ‘시중 통화량이 늘고 물가 수준이 오르면 단기적으로 효과가 있겠지만 장기 실질 GDP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입니다.
장기 성장률이 높아지려면 GDP를 이루는 경제 주체들의 산출물이 지속적으로 늘기 위한 기반이 닦여야 합니다. 예컨대 이민자가 꾸준히 증가해 노동 인구가 늘고 재화와 서비스 생산량이 증가한다거나, 동해에 새로운 유전이 발견되는 등의 ‘자연자원의 변동’ 혹은 ‘극적인 기술 혁신’ 등이죠.
2006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에드먼드 펠프스도 정부의 재정이 경제 성장률을 끌어올리는 데 한계가 있다고 봤습니다. 펠프스는 더 나아가 ‘모범 답안’을 하나 내놓았는데, 그것은 ‘작은 혁신’입니다. 기업에서 시장 혁신을 견인할 수 있는 장(場)을 정부가 만들어줘야 한다고 본 것입니다. 이건 ‘기업 규제 완화’로 해석될 수 있고, ‘인프라 확장’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산업 선진국들이 성장기 초기에 했던 ‘보호무역주의’와도 유관해 보입니다.
어찌 됐든,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혁신해 제품을 내놓고 성장을 하는 게 ‘대세’이자 ‘흐름’이 되어야 실제 장기성장률 진작으로 이어질 것 같습니다. 이런 작은 혁신, 좀 더 명확히 하자면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한 혁신’이 일어나야 우리 경제도 장기적으로 성장을 계속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조금 더 경제학 교과서(멘큐의 경제학)에 나오는 표현으로 옮기자면, ‘정부의 재정 확대가 민간의 확신을 강화하고, 동물적 충동을 되살린다면 수요는 증가하고, 민간 투자는 더 큰 폭으로 증가한다’가 되겠네요.
여기에 인구정책, 특히 이민에 대한 명확한 정책이 필요해 보입니다. 사회 구조 개혁과 맞닿아 있는데, 2000년대 미국이 일본보다 높은 경제성장률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민자 유입에 따른 인구 증가’도 한몫했다고 봅니다.
추경은 이제 한국 경제 성장률을 끌어올리는 시작입니다. 한국 경제의 성장 엔진을 되살리고 장기(잠재) 성장률을 높이기 위한 토론으로까지 이어졌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