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청색 LED에 얽힌 노벨상 이야기

by 팟캐김

일본의 노벨상 수상은 한국인들에게 언제나 배 아프다.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있지만 늘 '허탕'으로 끝난 것 같다. 올해도 한국인에게 노벨상은 ‘희망고문’이었다. 노벨문학상, 노벨화학상 부문에서 첫 한국인 수상자가 나올까 기대감이 높았지만 ‘역시나’였다.


이쯤 되면 나오는 얘기가 있다. ‘기초과학에 대한 꾸준한 투자가 선행돼야 한다’는 얘기다. 입시 위주의 교육제도도 바꿔야 한다고도 한다. 4년마다 치르는 월드컵에서 우리 국가대표 축구팀이 16강에서 탈락하고 ‘유소년 축구에 투자해야 한다’는 목소리와 같은 맥락이다. 시기만 다를 뿐 매번 반복된다.


노벨상에 목마른 한국인들을 더 허탈해질 때가 있다. 일본에서 노벨 수상자가 나왔을 때다. 노벨 물리학상, 노벨문학상 등 부문에서 꾸준하게 수상자를 내는 일본을 보며 다시금 ‘기초과학’, ‘기초 인문학’ 인재를 양성하자라는 주장이 나온다.


꼭 기초 과학자 육성이 노벨상 수상자 배출의 답일까. 노벨상은 한 기업에서 오랫동안 일한 ‘공돌이’에게 가기도 한다.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격’에 비유할 수 있지만 일본에는 일반 기업에서 일하다 보인 업적으로 노벨상을 받은 사례가 두 번이나 있다. 삼성과 LG 등 세계적인 기업을 보유한 우리로서는 부럽기 짝이 없다.


이중 한 명이 나카무라 슈지다. 2014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슈지는 1994년 고휘도(빛이 강한) 청색 LED를 개발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우주선 계기판이나 전자제품 표시등에나 쓰이던 LED가 조명과 디스플레이 등에 쓰일 수 있게 된 덕분이다.


이름도 흔한 나카무라 슈지는 지금 미국 대학교의 정교수로 일하고 있다. 나고야 근처 시골 기업 ‘니치아’에서 형광체 개발을 하던 무명의 엔지니어에서 인생 역전을 한 것. 이게 다 청색 LED 개발 덕분이다.


그렇게 대단한 개발이었던가? 그렇다. 1980년대만 해도 청색 LED는 21세기 전에 결코 나올 수 없다고 여겼다.


게다가 슈지 교수는 보통의 일본인 정서로는 좀처럼 하기 힘든 일을 했다. 자기가 일했던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던 것. 직무 발명에 대한 회사의 포상이 적긴 했지만 평생직장 개념이 강한 일본인에게는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Shiju.jpg 나카무라 슈지 (사진 : 위키피디아)


슈지 교수(이제부터 교수로 칭하자)는 2001년 자신이 다니던 기업에 소송을 걸었다. 직무 발명에 대한 대가를 요구한 것. 청구 비용은 2000억 원이었다.


◇LED란?


LED는 Light Emittung Diode의 약자다. 우리말로 ‘빛을 내는 반도체’. 반도체에서도 빛이 날 수 있다는 사실이 발견된 것은 20세기 초반이다. 각각의 원자에서 전자가 하나 남는 N형 반도체(마이너스극)와 정공이 있는 P형 반도체(플러스극)가 접합했을 때, 전자와 정공이 만나면서 나오는 에너지가 빛으로 바뀌는 현상이다.


이론적으로 LED는 전기 에너지 전부를 빛으로 바꾼다. 등기구로 만들어진 LED조명에서는 열이 나기는 하나 백열등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백열등과 비교했을 때 에너지 절감률은 80%에 이른다.


LED가 내는 색깔은 P-N 접합에 쓰이는 반도체 원소에 따라 달라진다. P형 반도체와 N형 반도체 간 에너지 차이가 파장의 차이를 낳는다. 이 파장의 차이가 적외선, 자외선, 가시광선 등으로 나타난다. 흔히 빨간색 빛을 내기 위해서는 갈륨비소(GaAS)가, 초록색 빛을 내기 위해서는 갈륨인(GaP)이 쓰였다.


빨간색과 초록색은 비교적 이른 시간대에 상용화됐다. 증착이 비교적 쉬웠던 덕분이다. 1960년대 아폴로 우주선내에 쓰였을 정도다. 이때는 조명보다 표시등 역할이 컸다.


우리가 보는 일반 빛이 되기 위해서는 파란색 파장이 섞여야 했다. 그것도 강한 파란색 빛이다. 푸르스름한 빛을 내는 LED는 존재했지만 눈 부시도록 빛나는 청색 LED는 요원했다.


청색 LED가 어려웠던 이유는 반도체 물질의 받침으로 사용되는 사파이어 기판에 파란색 빛을 내는 물질의 증착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각기 물질의 성질 차이가 있는 것처럼 파란색 빛을 내는 물질은 까탈스러웠다. 사파이어 기판에 좀처럼 붙지 않거나 붙어도 균열이 쉽게 일어났다.


수십 년 실패가 거듭됐을 무렵 나카무라 슈지가 나섰다. 청색 LED를 개발하겠다고 회사에 출사표를 던졌다. ‘무위도식한다’고 빈축을 들었던 ‘나카무라 최후의 선택지’였다.


슈지 교수는 남들은 힘들다고 여겼던 질화갈륨(GaN)으로 도전했다. 이론상 가능했지만 실재로는 어렵다고 여겼던 물질이다. 다양한 시도를 한 끝에 슈지 교수의 선택은 성공했다. 일반 조명과 비슷한 수준의 빛을 LED도 낼 수 있게 되면서 조명과 디스플레이 산업 판도까지 바뀌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컴퓨터 모니터의 백라이트유닛(뒤에서 빛을 쏴주는 광원)도 LED가 쓰이고 있다. 조명도 마찬가지다. TV가 극적으로 얇아진 이유도 LED가 쓰이면서부터다. 그전에는 형광등과 비슷한 원리의 백라이트유닛이 쓰였다.


◇고집쟁이 나카무라의 집념 덕에 탄생한 '청색 LED'


여기서 나카무라 슈지 교수에 대해 언급해보자. 그의 자서전 '좋아하는 일만 해라'를 보면 슈지 교수는 루저(loser)에 가까웠다. 슈지 교수는 일본 경기가 최전성기였던 1970년대와 1980년대 지방 소기업에서 독자 엔지니어로 일했다. 유명 대학을 나왔다거나 이름난 수재는 분명 아니었다.


그가 일했던 니치아는 형광체 개발·생산 회사였다. 슈지는 이곳에서 형광체 개발을 위한 연구원으로 일했다. 기업 입장에서 ‘필요한 인재’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독보적인 성과’를 내는 키(key) 인재는 아니었다. 상사들로부터 “나카무라는 무위도식한다”, “돈 안 되는 것만 만든다”라는 빈축도 곧잘 들었다. 그의 자서전에도 이 같은 내용은 수차례 나온다.


사실상 개인 연구실이었지만 개발 과정에서 의사 결정이 빨랐다는 점에서 장점이 됐다. 덕분에 기발한 방법으로 질화갈륨의 막을 얇게 입히는 MOCVD를 기존 배출구 하나가 아니라 두 개의 배출구로 해서 흡착을 쉽게 했다는 점도 그가 독자적으로 결정하고 연구를 진행했다.


생소하기 짝이 없는 ‘MOCVD’란 기계는 유기금속 화학증착 장비를 뜻한다. 공대생이 아닌 이상 이해하기 어렵다. 유기화합물을 가스처럼 만들어 증착시키는 기계로 생각하자.


청색 LED 개발에 들어가고 수년이 지난 뒤 GaN이 성공적으로 기판에 증착했다. 이것을 잘게 잘라 '칩'처럼 만들고 전류를 흘려보내면 강한 빛의 파란색이 나왔다.


그가 청색 LED를 만들면서 쓴 돈은 우리 돈으로 50억 원 정도. 대형 기관과 대학교에서 만들며 쓰던 비용의 10분의 1 정도다.


일본 내 철저한 아웃사이더였던 슈지 교수. 그래서 그런지 그는 일본식 교육 체계와 기업 풍토에 성토했다. 그 자신이 일본이라는 시스템에 저항하고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면 청색 LED라는 대단한 성과를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주입식 교육과 경직된 기업 문화가 그의 성토 타깃이다. 철저히 조직에 순응하게 만드는 '소 뒷걸음질하다 쥐 잡은 격'이라고는 해도 청색 LED 개발에 실패했다면 그저 그런 시골 기업 엔지니어로 은퇴했을지 모른다.


일본식 교육·사회 구조와 비슷한 우리나라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왜 한국에서 노벨상이 안 나오는지. 결국은 ‘좋아하는 일을 능력껏 할 수 있는 인재를 배출하는 사회’가 노벨상 수상의 정답은 아닐는지.


참고 자료 : '좋아하는 일만 해라' -나카무라 슈지 저

keyword
작가의 이전글다이아TV 팀장과 나눈 대화.."소통이 미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