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피고 지는 이야기
2021. 3. 29.
벚꽃이 피고 지는 계절입니다. 제가 사는 진주 주변에도 예쁜 벚꽃길이 많고, 그중에서도 쌍계사 십리 벚꽃길과 쌍계사로 올라가는 19번 국도인 하동-구례간 벚나무 도로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해마다 피는 벚꽃이니 해마다 실컷 볼 수 있을 것 같지만, 벚꽃이 피고 지는 한두 주 동안 정말 벚꽃이 활짝 피어 있는 날, 그러니까 아직 덜 피어서 꽃보다 꽃망울이 더 많은 것도 아니고 절정이 지나 꽃잎이 지면서 눈처럼 흩날리는 때도 아닌, 온전히 활짝 핀 꽃들이 온 나무와 하늘을 뒤덮으면서 피어 있는 날은 아주 잠깐, 기껏해야 이삼일 정도입니다. 그런데 봄에는 비도 자주 내리고 황사도 자주 몰려오곤 하지요. 그러니 그 이삼일 동안 봄비도 내리지 않고 황사도 오지 않아서 더할 나위 없이 화창한 봄 햇살 아래 천지에 가득한 벚꽃을 만나게 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아주 운 좋게 그런 날 벚꽃 길 아래에 설 수 있다면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1), 그 아득한 아름다움에 넋을 잃게 되지요.
벚꽃 피는 봄이 되면 형편이 되는 대로 아내와 함께 가까이 혹은 조금 멀리 있는 벚꽃길을 찾아보곤 합니다. 모든 길이 다 아름다운데 그래도 역시 그 중에 으뜸은 백리 벚꽃길 19번 국도와 쌍계사 십리 벚꽃길입니다. 하지만 이십여 년을 진주에 살면서도 정말 화창한 봄날 절정으로 핀 하동과 쌍계사 벚꽃길을 지나가 본 경험은 딱 한 번입니다.
봄 햇살이 눈부시게 내리쬐는데 둥치가 굵은 고목 벚나무들을 뒤덮으면서 활짝 핀 벚꽃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길을 지나는 일은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마치 세상에 없는 어떤 데를 잠깐 다녀온 것 같았습니다.
이제 화사하게 피었던 벚꽃들이 거의 지고 새잎들이 돋아나고 있습니다. 그리 장하게 피었던 벚꽃이 저리 허망하게 지고 보니 사람의 마음으로는 아쉽기 그지없지만, 정작 자연에는 아무런 아쉬움이 없습니다. 때를 따라 꽃이 피었다 지고, 때를 따라 잎이 돋고 열매가 맺어서 자라고, 또 때가 되면 단풍이 들고 낙엽이 지고, 그리고 때가 되면 겨울이 와서 앙상한 가지들을 남깁니다. 자연(自然), 저절로 그러할 뿐 어느 때가 더 좋은 것도 어느 때가 더 나쁜 것도 아닙니다. 서둘지도 않고 게으름을 피우지도 않는 벚나무는 이제 꽃들을 내리고 잎들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벚꽃 진 자리를 살펴보니 빨갛게 고운 꽃받침 옆으로 초록과 연두의 작은 잎들이 가득합니다. 내 마음에나 꽃이 더 예쁘지, 꽃이며 열매며 잎들끼리 무슨 자리다툼이 있겠습니까.
눈 크게 뜨고 보면 온 세상 온 때가 다 꽃천지이겠습니다. 하지만 내 마음이 어리석고 좁아서 꽃그늘 아래서 아귀다툼하고 살 때가 훨씬 많습니다. 세상에서 들려오는 슬프고 가혹한 이야기들을 전해 듣노라면 옛 성인들이 이르신 ‘여기가 그대로 천국이고 정토’라는 말씀이 몽땅 헛말인 거 아닌가 싶지만, 벚꽃 화사하게 피었다 지는 며칠을 지내고 보면 역시 그 말씀 그대로이다 싶으면서 마음이 조금 내려집니다.
꽃진 자리를 아쉬워하는 마음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니 나무랄 것 아니지만, 때를 따라 오고 가시는 꽃과 잎을, 그저 왔다 지나가는 계절을 잘 맞이하고 보내는 것이 더 슬기롭게 삶을 누리는 게 아닐까요. 봄이 돌아왔다고 하지만 돌아오는 봄이 어디 있겠습니까. 늘 새롭게 오는 봄인 거지요.
힘들고 슬픈 소식 가득한 세상입니다. 그래도, 벚꽃 진 자리에 곱게 돋아나는 벚나무 새 잎들 기쁘게 맞이하시는 시절이면 좋겠습니다.
1) 이백의 시 ‘산중문답’의 한구절. 원문과 해석은 아래와 같다.
問余何事棲碧山 문여하사서벽산
笑而不答心自閒 소이부답심자한
桃花流水杳然去 도화유수묘연거
別有天地非人間 별유천지비인간
청산에 사는 이유 사람들이 물으면
말없이 웃기만 해도 마음 한가롭네
물위에 진 복사꽃 아득히 흘러가니
이런 곳 어디 있나 인간세상 아니로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