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고를 여의는 경험

기도와 수행에 대한 짧은 이야기

by 천생훈장

에고(Ego)로부터 떠남, 에고의 여읨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사람에게 범재신론( all-in-God-ism, Pan-en-theism)이나 만유불성(萬有佛性)을 이야기하는 일은 위험할 수도 있다. 누군가가 잘못된 방식으로 기독교의 신화 교리(神化, Deification, 매우 불경스럽게 들릴 수도 있는 이 말은, 놀랍게도 카톨릭과 신비신학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신학 용어이자 교리이다. 기도와 수행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일치를 경험하고 이를 통해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을 신화라고 한다. 알렉산드리아의 성 클레멘트는 “그분은 우리를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인간이 되셨다.”라고 하였고, 아타나시우스는“하느님의 외아들은 당신 신성에 우리를 참여시키시려고 우리 의 인성을 취하셨으며, 인간을 신으로 만들기 위하여 인간이 되셨다.”라고 말한다)나 불교의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부처님께서 태어나시자마자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시고 하늘과 땅을 가르키며 하셨다는 이 유명한 말씀은 매우 자주 잘못 인용되어서 자아를 부풀리는 데 사용되곤 한다)을 이해할 경우, 그는 곧장 자신의 에고를 종교적으로 부풀리고 영웅이나 초인 혹은 신의 자리에 자신을 올려놓는다. 에고의 부풀림은 죄된 본성을 지닌 인간이 다양한 방식으로 그리고 매우 자연스럽게 행하게 되는 방식이지만, 종교적이거나 영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날 때 특히 해로운 것 같다.


그렇다고 에고의 여읨을 경험하는 일이 항상 안전하거나 좋기만 것은 아닌데, 그러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죄된 본성으로 인해 그는 여전히 유혹과 욕심에 끄달리고 허물을 범하는 존재로 있기 때문이다. 완전한 에고의 여읨과 완전한 깨달음을 통해 더 이상 허물과 죄를 범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면 그는 아라한(阿羅漢), 보살(阿羅漢) 혹은 성인(聖人)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우리 모두가 알듯이 나도 당신도 그런 존재는 아니다. 그러니까 어쩌다 에고의 소멸을 슬쩍 보았거나 겪었다 하더라도 계속해서 기도하고 수행하지 않는다면, 에고의 여읨에 대한 경험이야말로 가장 완고한 에고 강화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

다마스쿠스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남으로써 성령 체험, 그러니까 에고의 여읨을 경험했던 바울 사도, 그 경험으로부터 출발하여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20)”는 위대한 고백을 했던 바울 그분조차도 그런 연유로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 7:21-24)”라는 정직하고 절절한 고백을 하신 것이 아닐까.


매일매일의 수행과 기도를 통하여 날마다 조금씩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 그래서 그 분의 온전함에 참여하는 것이 신앙의 진보이겠지만, 동시에 사실은 이미 내가 하나님 안에 있는 온전한 존재임을 깨달을 필요도 있다. 온전하면서도 온전하지 않은 존재의 역설, 그 긴장과 떨림을 잊지 않고 사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敬畏, 공경하면서 두려워 함)하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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