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누가 16:1-13)
목사님께서 휴가를 가셔서 땜빵으로 주일 설교를 하였습니다. 좀 더 꼼꼼히 준비를 해야 했으나, 이런저런 일정으로 바쁘다는 핑계로 얼기설기 이야기를 썼네요. 민망한 마음ㅠㅠ
2023. 8. 20. 설교 “지극히 작은 일”
본문: 누가복음 16:10-13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서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개역개정)
10 지극히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큰 일에도 충실하고, 지극히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 일에도 불의하다. 11 너희가 불의한 재물에 충실하지 못하였으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12 또 너희가 남의 것에 충실하지 못하였으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인들 내주겠느냐? 13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그가 한 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 쪽을 떠받들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새번역)
이번 주간에 목사님께서 휴가 중이셔서 설교와 예배 안내를 대신합니다.
본문의 앞 부분을 다 읽지는 않았는데, 오늘 읽은 본문은 옳지 않은 청지기의 비유라는 예수님의 말씀 중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누가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 나오지 않는 예수님의 말씀이 많은데 오늘 나누는 ‘옳지 않은 청지기’ 이야기도 그 중 하나입니다. 이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해석하기가 쉽지 않아서 신학자들이 ‘난해구절’로 분류하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대부분 내용을 알고 계실텐데, 옳지 않은 청지기 이야기는 대략 이렇습니다.
어떤 부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그의 전 재산을 관리하는 청지기가 있었습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모든 재산을 맡아서 관리하는, 그러니까 처분이나 매매도 가능한 정도의 권한이 있었다고 하니 대단한 권한을 받은 사람이지요. 창세기에서 보디발 장군의 집 청지기를 맡은 요셉이 그 본보기라고 합니다.
어느 날 이 부자는 청지기가 자신의 소유를 함부로 낭비한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래서 청지기를 불러서는 너는 더 이상 청지기 일을 할 수 없다고, 그러니까 이제 너는 해고다라고 통보를 합니다.
직업을 잃게 된 청지기는 실직 후의 삶을 대비하여 한 가지 계책을 마련했습니다. 그것은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의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채무자들을 한 사람씩 불러서 그들의 빚을 자기 마음대로 줄여 주었습니다. 청지기는 이 일을 통해 자신이 직업을 잃고 갈 데가 없어졌을 때 은혜를 입은 빚진 자들이 자신을 맞이해 주기를 바랬습니다.
여기까지 읽고 나면 우리는 보통 청지기가 참 교활하고 나쁜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자기 것도 아닌 걸 마구 낭비한데다, 그렇다는 지적을 받고는 마음대로 빚을 탕감해 주기까지 했으니까요. 그런데 그 다음 부분이 참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 청지기의 주인은 그가 한 일을 알고는 오히려 이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했습니다.
이 청지기는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자신의 미래의 삶을 대비해야 한다며 주인의 재산에 심각한 손해를 끼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주인은 그의 행동을 “지혜롭다”고 여기며 그를 칭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비유를 마무리하면서 예수님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을 하시는 거지요.
앞에서 이 구절은 해석하기 어려워서 난해구절로 분류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난해구절은 오해의 소지가 많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므로 어떤 하나의 해석이 일방적으로 옳다라고 할 수 없고, 공동체와 각자의 신앙 안에서 신중하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해석 또한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면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바뀔 수도 있음을, 그러니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해석과 적용이 잠정적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저도 이 이야기와 결론이 참 어렵습니다만, 작년에 제가 참여하는 모임의 수련회에서 이 본문 이야기를 나누고 묵상하면서 개인적으로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조금 나누고 오늘의 제목인 지극히 작은 일, 혹은 지극히 작은 것에 대한 묵상도 나누려고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청지기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그 고백을 할 때 우리가 떠올리는 내용은 다 다르겠습니다만, 저는 청지기됨의 핵심이 '무엇도 내 것이 아님을 아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과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궁극적인 차원에서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건 단순히 지금 우리가 가진 재물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우리의 육체, 더 나아가서는 우리의 생명과 자의식까지를 포함하여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언젠가 때가 되면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의 청지기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살펴 보십시오.
청지기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재물, 육체와 정신을 우리는 과연 하나님이 보시기에 허투루 쓰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씀은 우리의 시간이나 재물을 교회 봉사나 명시적인 신앙적인 활동에만 사용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잊지 않고 사람들을 대하거나 일상을 살아갈 때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는 것이 옳은 일이라는 뜻이지요.
오늘 본문에서 주인은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고,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모두 알고 있듯, 언젠가 우리는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하는 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청지기의 직무를 내려놓게 되는 날이 반드시 있지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지만, 신앙적으로는 매우 필요하고 유익한 일이기도 합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누리고 가진 것들이 결국 언젠가는 지나가고 마는 것임을 깊이 깨닫는다면 삶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매우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죽음을 앞에 두면 과연 무엇이 중요한 일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를 분명하게 알게 된다고 하지요. 저도 어쨌거나 의사이니 질병과 죽음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고 돌아보게 될 일들이 있습니다만,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되었을 때 우리가 기억하는 것, 후회하는 것, 고마워 하게 되는 것들이 어떤 것일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니 신앙적인 차원에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오늘 비유에서 가리키고 있듯이 우리가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될 때, 더 이상 청지기의 직분을 감당할 수 없게 될 때 우리를 맞아주시는 분, 즉 예수 그리스도와 진실된 관계를 맺는 일입니다. 해고 통지를 받은 청지기는 어디에 집중합니까. 자신이 청지기 직분을 잃었을 때 자신을 맞아주게 될 사람들에 집중합니다. 그처럼 우리의 삶은 우리를 맞아주시는 분,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들이 결코 예수님과 비교될 수 없음을 분명하게 깨닫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시기를 바라는데, 이 말은 재물이나 건강처럼 우리가 누리는 것이 나쁘다거나 의미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치 그것이 영원한 것처럼, 혹은 영원해야 할 것처럼 움켜쥐는 것이 나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비유의 재물이 불의하다는 말은 수단에 불과해야 할 재물을 마차 인생의 유일하고 궁극적인 목적처럼 붙들고 있는 태도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재물이든 시간이든, 가족이든 건강이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악한 것이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선하고 좋은 것이라고 해야겠지요. 그러면 무엇이 악한 것일까요. 그렇게 맡겨주신 것들을 원래부터 내것인 양 움켜쥐고 낭비하는 것, 지나가 버리는 것들을 궁극적인 것처럼 오해하고 의지하는 것이 악한 것입니다. 정직하게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 본다면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하나님 대신 돈을 의지하는지, 얼마나 자주 하나님의 자리에 가족이나 자기 자신을 올려놓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런 태도를 우상숭배라고, 죄라고 하지요.
이제 오늘의 제목으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10절 말씀입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 항상 앞의 구절에 주로 마음이 갔습니다. 그리고 그걸 명령으로 이해했지요. 작은 일에 충성하라는 뜻으로요. 아마 마태복음 25장 40절에서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셔서 자연스럽게 두 말씀이 연관되어서 그렇기도 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번 주에는 뒤 쪽의 구절이 더 와 닿았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이것은 근본적인 나의 상태, 우리의 상태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노라고 하면서 남들에게는 좋은 신자인 것처럼 보이려고 노력하지만, 일상의 수많은 상황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내 욕심이나 의도를 따라서 살아갑니다. 아니 사실은 거의 대부분의 시간과 재물을 그렇게 사용하고 있다고 해야겠지요.
예배나 기도를 드리는 것은 그 순간만을 거룩하게 살면 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배를 통하여, 그리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행위를 통하여 우리는 일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더 예민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 뜻에 따라 살 수 있도록 힘을 얻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예배하고 기도할 때는 경건하지만(혹은 경건한 척 하지만) 우리의 일상에서는 전혀 다르게 살고 있다면 어쩌면 우리는 예수님께 집중하고 따르는 삶을 살고 있는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내 시간과 재물을 삶의 최우선 순위로 삼지만 하나님께 인정도 받고 싶어서 마음 속으로 타협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우리가 정말 진지하고 정직하게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우리의 자원을 하나님을 위해 쓰기 원한다면, 예배와 기도, 성경을 읽는 시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하고 삶에서 그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조금씩이라도 더 사랑하게 되고, 더 기뻐하고, 더 평화롭고, 더 참아주고, 더 너그럽고, 더 착하고, 더 신실하고, 더 온화하고 단정한 사람이 되어야겠지요. 그것이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일,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삶이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불의한 삶, 불충실한 삶이 우리의 기본적인 상태라면, 우리는 어떻게 충성된 삶, 충실한 삶으로 바뀔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의 능력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주셔야 하는 일입니다. 예배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간다고 표현했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그런 자리로 이끄시는 거지요. 그 사실을 깨닫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삶, 더 정확하게는 작은 일도 큰 일도 없는 온전하고도 하나된 삶을 발견하고 살게 될 것 같기도 합니다. 그것이 구원이고 부활이며 영생이 아닐까 싶네요.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제목과 본문에 인용한 그림은 스위스 화가인 외젠 뷔르낭(Eugène Burnand)의 'The Dishonest Steward, 1908'입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소속인 도토리교회의 홈페이지 게시물에서 빌려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