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이들이 응애응애~ 누워 울던 아기 시절, 나는 같은 시간에 먹이고, 재웠다. 분유를 먹는 양도 비슷했고, 같은 시간에 잠도 잘 잤다. 두부와 미역으로 촉감 놀이를 해주고, 매일 밤 똑같은 책을 읽어주었다. 한 아이가 웃으면 또 다른 아이가 따라 웃었고, 나도 함께 웃었다. 나는 두 아이의 엄마지만 한 사람이기에, 똑같이 해 주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고, 그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러나 아이들이 밥을 먹기 시작하면서 각자의 색이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딸은 면을 좋아했고, 아들은 밥을 좋아했다. 딸은 매일 사과를 찾았고, 아들은 바나나를 외쳤다. 딸은 ‘콩순이’를 좋아했고, 아들은 ‘꼬마버스 타요’를 보길 원했다. 딸은 분홍색을, 아들은 하늘색을 좋아했다. 놀이터에서도 아들은 미끄럼틀에서 뛰어노는 것을 좋아했고, 딸은 그네를 살살 밀어주는 것을 즐겼다.
학습에서도 차이가 나타났다. 두 아이에게 똑같은 환경을 제공했다. 같은 동화책을 읽어주었고, 같은 영어 집중 듣기를 시켰으며, 같은 연산 문제집을 풀게 했다. 같은 수학학원에 보냈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아들은 수학에 흥미를 보이며 좋은 성과를 냈고, 딸은 영어와 한국사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나는 똑같이 키우려 했지만, 아이들은 저마다 다르게 자라났다. 슈퍼에서 팝콘을 사오면 아들은 맛있게 먹고, 딸은 손도 대지 않았다. 돈가스를 튀겼더니 한 아이는 잘 먹고, 다른 아이는 먹지 않았다. 같은 학원을 다녔지만 한 아이는 즐겁게 다녔고, 다른 아이는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각 아이에게 맞춰 주려면 나라는 엄마 한 명으로는 부족했다. 하지만 첫아이들이기에 최선을 다했다. 끼니마다 각자의 입맛에 맞춘 반찬을 준비했다. 면을 좋아하는 딸을 위해 잔치국수를 만들고, 밥을 좋아하는 아들에게는 따로 밥을 차렸다. 매 끼니 한 식탁에 다른 반찬이 올라갔다. 운이 좋은 날에는 두 아이가 모두 좋아하는 메뉴가 겹치기도 했다. 슈퍼에서는 각자 좋아하는 과자를 고르게 했고, 장난감을 고를 때도 원하는 것을 선택하게 했다. 음식을 준비하는 것보다 물건을 사는 것이 더 쉬웠기에, 그 부분만큼은 수월했다.
초등학교 입학 후, 아이들은 분반을 했다. 점점 각자의 색이 짙어지면서 ‘쌍둥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각자의 생활을 해보기로 한 것이다. 아이들은 학교생활에 잘 적응했지만, 엄마인 나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분반 후 반마다 과제도, 준비물도 달라졌고, 학교에서의 연락도 두 곳에서 오니 더욱 바빠졌다. 한 명의 엄마지만, 두 엄마의 역할을 해야 했다. 학교에서는 둥이들이 쌍둥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친구들도 있었다. 나는 온전히 딸의 엄마, 아들의 엄마로 불리게 되었다.
결국, 똑같이 키우려 해도 아이들은 다르게 자란다. 같은 반찬을 주어도 더 맛있게 먹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한 아이는 아예 먹지 않는다. 같은 환경을 제공해도 받아들이는 것은 아이들의 몫이다. 그래서 나는 결국 아이들에게 맞춰 육아를 할 수밖에 없었다. 똑같이 키우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원하는 방향을 존중하며 다르게 키우는 것이 맞다는 것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