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적 가드닝

나를 견디게 하는 것들

by 모지란

겨울 하면 역시 포인세티아다. 진녹색 이파리 위로 새빨간 이파리가 얹혀있는 모양새가 꼭 초록색 원피스에 산타 모자를 쓴 아이돌 같다. 기온이 떨어지고 바람에서 비릿한 겨울향이 나기 시작하면 화원마다 유리너머로 자주 보인다. 올 겨울에도 나는 퇴근길에 화분 다섯 개를 샀다. 보통 화분은 결제와 동시에 종이봉투에 담기지만 포인세티아는 특별대우를 받는다. 포인세티아는 차례대로 찬 바람 맞지 않게 깊은 상자에, 뽁뽁이로 소담스레 포장된다. 아름답고 까탈스럽다. 집사는 공주님들을 마차에 태워 거실로 모신다. 나는 계절의 주인을 맞이하는 즐거움으로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다. 늘상 18도 이상인 지구 반대편에 살다가, 계절 온도차가 극단적인 한반도의 원치 않는 시즌 특수에 동원되는 것이 외려 안쓰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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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양한 식물은 집안에 적절한 자리를 찾으면 그저 내버려 두어야 한다. 환경이 바뀐 뒤에는 물도, 영양제도 조심해야 한다. 분갈이를 한다면 죽인다고 덤비는 셈이다. 사그라든 이파리가 내심 불안했지만 못 본 척 지난다. 예쁘다고 손 대지 않는다. 절대 안정이다. 일주일이 지나고 생존율 40%, 여태껏 중에 가장 높은 수치다. 남은 두 개의 화분도 상태가 썩 좋진 않다. 아침에 환기하겠다고 열어두고 간 창문이 제 역할을 과하게 한 모양이다. 찬 바람 닿았다고 이파리가 까맣게 탔다.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마른 흙에 물을 준다. 다음 일주일이 지나니 빨간 잎은 떨어져 없지만, 줄기 곳곳에 볼록하게 싹이 돋는다. 해 뜨기 전 출근하는 내편을 붙들고 “봤지?, 봤지?” 자기증명의 시간을 갖는다. 이제야 말 할 수 있다. 나의 취미는 가드닝이다.


베란다에서 수도 없이 떨군 떡잎, 꽃잎, 풀잎, 갖가지 채소와 허브들에게 미안하지만 나는 가드닝을 사랑한다. 나는 백성을 들여오고 내보내기를 반복하는 정원의 왕이다. 우리 아들은 호를 가졌던 조선의 왕들처럼 내게 ‘파괴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내 입장에서는 다소 오해가 있는 이름이다. 식물을 직접 파괴하는 것이 아니니까. 사랑만큼 커다란 무지가 범인이다. 처음에는 식물을 플라스틱 화분에서 꺼내어 보지도 못하고 죽였다. 너무 사랑하거나 오래 잊었기 때문이었다. 식물의 MBTI는 E보다 I에 가깝다. 성격에 따라 햇빛조차도 가리는 아이들이 있다. 하물며 물 주는 집사는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관계 맺고 싶어한다. 흙이 바싹 말라 공기 중에서라도 습기가 간절하면, 그제야 집사를 찾는다.


몬스테라처럼 이파리가 크고 물을 좋아하는 식물군은 비교적 표정 읽기가 쉽다. 물이 필요하면 잎이 쳐지고 몸이 아프면 반점이 생긴다. 생명력도 좋아 몇 년 전 들인 여인초는 줄기 중간을 썩둑 잘라내었는데도 기어이 살아났다. 처음에는 분양 받아온 흙이 좋지 않았는지 벌레가 끼고 이파리 끝이 타들어갔다. 지금 사는 집에 이사오는 과정에서 설상가상으로 큰 이파리 몇 개가 죽-죽 찢어져 버렸다. 시름시름 앓던 것을 보내줘야겠다는 생각에 상투처럼 조금 남기고 잘랐는데, 겨울을 나더니 두루마리처럼 말린 새순이 몇 번이나 올라왔다. 오늘 아침에는 길게 키를 키우고 안방을 들여다본다. 붙임성이 좋은 친구들이다.


다육이는 결코 키우기 쉬운 식물이 아니다. 바람을 좋아하는 터라 집사의 부지런함을 요한다. 겨울 동면에 들어가더라도 과한 추위는 금물이다. 기상캐스터가 화면 너머로 하얀 입김을 뿜는 날에는 못 쓰는 헝겊이라도 덮어주어야 한다. 나는 다육이가 가진 탱글한 이파리가 교육된 E의 성격 같다. 단단하고 잘 견딜 것 같은 모습으로 보이지만 통풍, 햇빛, 물 중 하나라도 안맞으면 투명하게 삭아버린다. 다육이 목이 좀 웃자랐을 뿐, 별 일 없다고 안심하면 순식간에 무른다. 가끔 잎에 손을 대어 말랑해지지는 않았는지 확인이 필요하다. 선인장은 상황이 위협적이 되면 느닷없이 새 가지가 나오는 등 반항이라도 한다. 다육이들은 뿌리가 다 없어지도록 괜찮은 척을 한다. 그래서 집사가 알아차릴 쯤에는 늦는다.


3월이 되어 추위가 지나면 꽃도 곧잘 들인다. 꽃은 더더욱 살아남는 경우가 적다. 그래도 카랑코에, 칼랑디바는 여러해 꽃을 피워서 꽤나 오래 두고 키우고 있다. 가지치기를 해도 잘 크고 가지들은 또 다른 꽃대가 되어준다. 해가 짧아지면 취침시간을 잘 조절해야 꽃을 볼 수 있다. 포인세티아의 붉은 잎도 마찬가지이다. 인위적으로 낮을 짧게 만들어준다고 하여 단일(短日) 처리라 부른다. 가을은 집사인 내가 모처럼 조물주가 되어보는 시기이다. 꽃들에게 얻은 교훈이 있다. 일이 많아질수록 잠을 잘 챙기려고 한다. 종일 낮처럼 일한다고 인생이 만개하지는 않으니까.


나 하나 챙기기도 힘든 인생, 그냥 두면 농원에서 잘 커갈 생명들. 왜 굳이 집에 들여 부비고 살고 싶은건지 조물주도 궁금할 것이다. 몇 년 전에 친한 후배가 사주를 봐준다하여 예수님께 무례를 무릎쓰고 팔자를 적었다. 내 사주는 광활하고 열이 많은 흙이란다. 그 후배는 내게 땅이 마르지 않으려면 뭐든 많이 길러야 한다며 자식을 많이 낳아야 한다고 했다. 내 팔자가 참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한 자씩 풀어나가며 후배와 몇 시간을 웃었다. 아이는 외동으로 키우고, 아이처럼 품어 키울 다른 것들을 찾아보다가 시작한 것이 가드닝이다. 식물을 키우기 전에는 인간관계를 정원 가꾸듯 했다. 마음에 크게 울타리를 쳐두고 매일 땅을 갈고 사람을 심었다. 어떤 날엔 해처럼 뜨고 다른 날엔 비처럼 내렸다. 애써 키워도 내 뜻처럼 아주심기가 되지는 않았다. 시절마다 꽉 채워 심어도 드문드문 해진다. 그럼에도 예기치 못하게 자라나는, 그것도 여러 해를 살아내는 관계도 있었다. 나이가 드니 울타리 밖에서 날아와 뿌리내려준 이들이 더 귀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일부의 마음밭만 황무지가 되지 않도록 갈아둔다. 나머지는 능력 밖이라 생각한다. 사랑하면 닮는다고 하더니만 반려식물 곁에서 나도 조금은 무던해졌나보다.


내 방 창가의 꽃기린은 야자수처럼 수형을 잡는 중이다. 대학원을 시작하고 난 뒤, 방에서 보내는 시간의 대부분은 읽기와 쓰기의 연속이다. 생각의 동굴에 깊이 빠졌다가 꽃을 보며 밖으로 나온다. 꽃기린은 보통 가지를 풍성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키우기에 잔가지를 모두 쳐버리는 스타일은 순전히 개인적 취향이다. 그 모습에는 일을 벌이고 나서 정리를 고민하는 나와 달리 꽃기린은 한 방향으로 쭉 뻗어 컸으면 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가지 수가 적으면 영양이 집중되어 꽃대를 더 많이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있었다. 몇 년간 꽃을 보니 꼭 그렇지도 않다. 내 방은 단창이라 단열이 부족해서인지 꽃대가 나왔다가 퍼석해지기를 반복한다. 작년에는 꽃대가 적고 자잘하게 꽃이 피었다. 한 우물만 파는 것도 답은 아닌가, 혼자 웃었다. 우습게도 성과가 적으니 더욱 감질맛 나고 꽃기린이 사랑스러워졌다. 이렇게 글로 적다보니 빨리 또 보고 싶어진다.


하지만 입춘이 진즉 지났음에도 훈풍은 아직이다. 조급한 마음으로 화분에 영양을 조금 넣는다. 지금은 비죽거리는 가시만 있는 줄기들에서 푸른 순이 돋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러다 꽃이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쓰기 위하여 노트북을 연다. 화면 앞에서 푹 절어있다가 다시 창가로, 베란다로 나간다. 일 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우리의 일상은 피었다가 지기의 반복이다. 일상의 패턴 안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일은 무척 어렵다. 사실 가드닝은 나를 바라보는 일이다. 식물의 성장은 더디므로 작은 변화를 알아보는 것은 집사의 몫이다. 그들은 살아내는 과정으로써 나를 응원한다. 그 시간을 아는 나에게, 어렵사리 피워낸 꽃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다. 나의 파괴적 가드닝은 창조를 욕망하게 한다. 죄스럽더라도 당분간은 식물로 넓고 뜨거운 땅을 채워 나가려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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