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yul Oct 10. 2023

솔직한 분노.

그리고 시작된 원망.

어떤 글들을 읽은 적 있다. 브런치에 올라온 누군가의 글이었는데, 하나는 내 편이라는 경험이 지속적으로 있었던 아이는 세상과 타인에 대한 믿음이 생기지만, 그런 경험이 적은 아이는 기댈 곳이 없다는 불안과 불신으로 독립심을 키워나가므로 아이의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해야한다는 내용이었다. 

또 하나는 지속적인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의 경우, 관심을 받다가 말아서 욕구불만이나 애정결핍이 생길 수 있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비슷한 내용을 TV에서 본 적이 있었던 터라 글에 담긴 메시지가 익숙하면서도, 강하게 와 닿았다. 부모의 지속적인 사랑과 관심, 존중, 수용, 공감, 상호작용의 경험이 성인이 된 후에도 영향을 끼칠 만큼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는 걸 글을 통해 다시 한 번 느꼈다.

  

한편으로는 내 심정을 대변해준 것 같아 위로가 됐다. 어떻게 정리해서 표현해야 할지 몰라 생겼던 갈증을 시원하게 해소시켜줬다.


그런 중요한 경험이 거의 없는 환경에 자라서 ‘가족’이란 관계에 불신이 깔려있었다. 가족이 있는데도 세상에 나 혼자라는 생각을 늘 했고, 온전한 내 편은 없다고 여겼다. 아무리 나를 진심으로 아껴주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자라면서 독립심을 자연스럽게 키웠지만, 뿌리부터 단단하고 건강한 독립심이 아니었기에 사회생활 뿐만 아니라 인생 자체에 번아웃이 온 순간이 많았다. 스물아홉부터 본격적으로 무너지고, 방황했던 시기도 그 순간들 중 하나였다.


초등학생 때 뜬금없이 혼자 일어나겠다고 알람시계를 사준다고 했던 걸 보면 독립적인 기질이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독립적이고 싶지 않았다.


나 역시 기대고 싶었고, 때론 의존하고 싶었다.

나약한 면을 보여도 괜찮다고 말해주며 감싸주길 바랐다.

때로는 철없이 굴고, 화내고, 짜증 부리고, 상처받아 모난 나의 모습도 안아줬으면 했다.


나의 상처도 인정받고 싶었다. 가족들의 생각하는 방식과 달라도 존중받고 싶었다.

진심으로 공감받길 원했고, 나의 입장을 배려해주길 바랐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어떤 것인지 느껴보고 싶었다.

내가 항상 잘하고 착하게 굴지 않더라도 이뻐해주길 바랐다.

동생이 잘못을 해도 그럴 수 있지 라고 이해해주고, 예민하다는 반응이 예상되는 말이나 행동을 해도 그럴 수 있다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을 주는 부모님이 미웠다.


예민하다, 유별나다, 부정적이다 라는 시선 대신 나라는 사람을 존중하고 이해해주길 바랐다. 나도 착하게 행동하지 않아도 무조건적으로 주는 사랑을 받고 싶었다.

무엇보다 색안경으로 나를 바라보지 않길 바랐다.

여자나 첫째라서가 아니라 나도 같은 자식으로 대해주길 원했다.

나도 지속적으로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었다.


이런 나의 바람들, 내가 받고 싶었던 것들을 내가 가족들에게 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렇게 내가 하는 걸 보면, 눈치 채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해준 만큼 돌려받고 싶은 마음까진 아니었다.


이윽고 나는 애써 눌러놨던 분노의 말을 뱉었다.


이기적인 생각이면 어쩌나, 잘못된 생각이면 어쩌나 등등 다른 생각은 집어치우고 내 분노에 집중하여 착한 척, 괜찮은 척과 자책을 하느라 하지 못했던 말들을 밖으로 꺼냈다.


“예민하다는 말, 그거 폭력이에요.”     

“진짜 부정적인 사람을 본 적이 없나보네요. 내가 정말 부정적이었으면, 우리의 추억에 기대어 좋게 생각하려 하지 않았을거라구요.”     

“부정적이면 뭐 어때요? 누가 그러는데, 부정적인 감정도 자연스러운 감정이래요.”     

“유별나고 부정적이고 예민하다는 밑바탕을 깔아놓고 대했던 당신들이 오히려 절 부정적으로 만들었어요.”   

“당신이 하는 말부터가 부정적인 건 모르세요?”


“하소연하고 서운한 거 말하는 사람한테 그런 식으로 하는 건, 공감능력 부족이에요.”     

“제가 유별나고 유난인가요? 저보다 더한 사람 많아요. 그러는 당신은 시야가 참 좁으시네요.”     

“그 사람의 생각이 이해하기 어렵고, 낯설다고 무조건 그 사람을 이상한 사람 취급 하지 마세요”  

   

“앞서서 생각하고, 생각이 많은 거. 인정해요. 그런데 그게 꼭 나쁜 걸까요.”

“억지평화를 강요하지 마세요. 모든 문제에 좋게 좋게는 회피 아닌가요?”     

“공감과 존중을 모르는 사람이네요.”


“당신이 경험한 게 전부이진 않아요.”     

“나라고 다 이해돼서 공감해준 게 아니에요. 사람마다 다른 거니까, 이 사람의 성격이나 입장에서 생각해보며, 그럴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으로 공감한 거라구요!”

“자신과 다른 의견에도 열린 마음으로 귀를 기울여주세요.”


비록 듣는 이가 없는 공간에서 허공에 말들을 쏟아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속이 시원했다. 스스로에게 솔직해진 내 모습이 보기 좋았다.

  

분노도 인간의 감정 중 하나인데, 폭력적이거나 나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건강하게 표현하면 되는 거였다. 그게 뭐 어렵다고 왜 분노를 지나치게 억압해왔던 걸까.

  

때로는 느낀 그대로 표현해도 되는데 왜 그렇게 가족들의 시선을 신경 썼던 걸까. 그래봤자 늘 돌아오는 건 가족들의 색안경 낀 시선이었는데 말이다. 다 부질없었다.




서(른)춘기에 방황하고, 인생 자체에 번아웃을 느껴서 무너지게 된 건 내 잘못만은 아니었다. 

가족들의 잘못도 있었다.     


내가 남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했던 것도, 긍정적인 감정은 잘 표현하면서 부정적인 감정은 표현하지 못한 것도,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지 못했던 것도, 세상에 나 혼자라는 생각에 우울했던 것도..... 

모두 나를 외롭고 쓸쓸하게 만든 가족들 때문이었다. 나를 단단하게 지탱해줄 가족이 곁에 없으니 나는 더욱 나약해졌고, 외부의 작은 힘에도 와르르 무너질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분노를 쏟아낸 후, 그렇게나 외면하고 싶었던 가족에 대한 원망을 마주했다.

애써 눌러놨던 그동안의 내 노력이 무색해진 정도로 자연스럽고, 재빠르게 원망이 시작됐다.     

매거진의 이전글 직면 그리고 회피의 대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