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과 현대의 앙상블
나는 심청전이 효(孝)의 감동적인 이야기라는 점에 대해 반감이 있다.
심청전의 동화 버전을 읽은 어릴 때는 반감이 들지 않았다. 심청이가 불쌍했지만 어쨌든, 해피엔딩이기에 기뻤다. 심청이의 선함과 효심에 하늘과 바다가 감동해서 행복한 나날들을 심청에게 선물한 내용에 감동했다. 하지만 기쁨과 감동은 얼마 가지 않았다.
점점 자라면서 앞, 뒤 맞지 않는 내용에 희생을 효(孝)라고 말하는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눈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모시며 착하고 건강하게 자라준 것만 해도 큰 효도인데 인당수에 몸을 바치면서까지 효도하는 부분에 반감이 들었다. 청춘은 물론 자신의 인생을 다 버리고 죽음을 택하는 건 효도가 아니라 희생일 뿐이다. 심학규도 효도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거다. 자기 때문에 자식이 행복을 포기하거나 먼저 세상을 떠나는 걸 어느 부모가 반길까. 그건 심청에게도 심학규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었다. 대신 나중에 두 사람이 재회하고, 부와 지위까지 얻고 행복하게 살지만, 여전히 반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무리 고생 끝에 낙이 온다 해도 죽은 자식을 그리워하고, 애통해하며 살았던 세월은 그 어떠한 거로도 위로나 보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심청이를 효녀의 표본으로 삼는 분위기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잊혔지만, 국악뮤지컬 ‘심청날다’를 보면서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다시 반감이 느껴졌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시간만큼 희미해진 줄 알았는데, 더 선명해져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심청날다’가 선명해진 반감을 조금 지워줬다.
‘심청날다’는 판소리의 주요 대목과 장면들에 서양악기를 접목하여 고전과 현대의 조화로 완성된 창작 국악뮤지컬이다. 쾌치나 칭칭, 둥둥둥 내 딸, 화초타령, 방아타령, 옹혜야 등의 판소리가 펑크, 소울, 블루스 음악으로 재탄생된 국악을 관객에게 선사했다.
‘심청날다’에서 ‘날다’는 공연에 출연한 국악 크로스오버 밴드의 이름이다. 밴드 날다(nalda) 는 보컬 오단해와 신예주, 기타 김수유, 색소폰 이유철, 키보드 이효주, 퍼커션 조재범, 드럼 김수준, 베이스 구교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jtbc ‘풍류대장’에 출연했던 오단해와 심청을 자연스럽게 소화한 신예주는 시원한 보이스와 감탄을 자아내는 실력, 맛깔 나는 연기력까지 겸비한 소리꾼이다.
신예주는 심청 역을 맡았는데, 100%의 싱크로율로 진짜 심청이가 고전소설에서 툭 튀어나온 것 같았다. 덕분에 열창하는 모습에서 심청이의 심정이 더욱 절절하게 느껴졌다.
오단해도 맛깔 나는 연기를 보여줬지만, 첫 씬부터 심학규로 나오지 않아서 조금 아쉬웠다. 아예 심학규 역을 맡아서 ‘둥둥둥 내 딸’을 불렀다면, 딸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잘 느껴지고 처음부터 단숨에 몰입하기 좋았을 것 같다.
앞에서 심청전에 대한 반감이 ‘심청날다’를 통해 조금 지워졌다고 이야기했는데, 바로 ‘소녀 심청’ 곡이 등장한 대목 덕분이었다.
극의 거의 첫 부분에 나온 ‘소녀 심청’은 효녀가 아닌 심청이라는 한 소녀로서 솔직한 심정이 담긴 곡이었다. 특히 ‘효녀 심청, 아니 소녀 심청’, ‘살아내기 위해’, ‘조금 미친 척 해야 했어’ 가사가 인상 깊었다. 이 가사들은 선명해진 반감을 희미하게 해줄 정도로 속 시원한 가사이자 소녀 심청의 서사였다.
원작에서 심청의 심정은 잘 드러나지 않았다. 주변의 효녀 심청이라는 평가에도 부담스러워하는 모습도 없었다. 인당수에 몸을 바치는 순간에도 심청의 인간적인 면보다는 환상에 가까운 면만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현대적으로 각색한 ‘심청날다’는 그렇지 않았다.
나이에 맞게 방황도 하고, 중2병도 있고, 아빠 말도 안 듣는 철부지 심청의 모습도 있었다. 물론 효심도 있었지만, 자신을 위할 줄도 알았다. 본인이 원하는 ‘나’로 성장하고 있는 야무진 소녀였다. 꿈과 열정도 있어서 고전소설에서의 심청이보다 이 작품에서의 심청이가 더 매력적이고, 입체적인 캐릭터였다. 대사도 요즘 트렌드에 맞게 각색되어서 보면서 공감도 하고, 웃음이 새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반감을 모두 지우기엔 역부족이었다. ‘심청날다’에서도 원작에서처럼 심청이는 끝내 인당수에 몸을 던졌다. 원작과 다른 점은 공양미 300석을 구할 수 있고 아버지의 눈을 뜰 수 있으며, 자신의 꿈인 가수가 될 수 있는 일석삼조라는 말에 인당수에 빠지기로 결심한 부분이다. 그렇다면 희생이 아닌데, 끝으로 갈수록 희생으로 몰아가는 분위기였다.
심청이가 인당수에 빠질 때 가수가 될 수 있을 거라는 벅찬 모습은 없고 죽음을 앞둔 사람의 모습만 있었다. 심학규도 자기 때문에 딸이 죽었다는 걸로 알고 있었다. 결국 자신을 희생하여 효도하지만, 부모에게는 효도가 아닌 그런 애매한 상황이 되풀이되어 아쉬웠다. 극적인 재회를 위해서였다면, 가수가 되어 돌아온다는 약속을 하고 떠났지만, 세월이 흘러도 돌아오지 않아 심학규는 체념하고, 심청은 기다리고 있을 아버지를 걱정하다가 재회하는 설정이었다면 완벽했을 거라는 아쉬움이 들었다. 각색이기에 많은 부분을 수정할 수 없으므로 이해도 되지만,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쉬움이 남았던 스토리였지만, 국악과 밴드의 만남에서는 아쉬움이 조금도 남지 않았다.
공연을 진행했던 국립국악원 예악당은 차분하고 편안한 분위기에 연으로 천장을 꾸며 한국의 멋을 살린 매력적인 곳이었다. 고전미가 돋보이는 공연장에서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국악을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기본적인 정보를 알고 가서 예상했는데도 고전적인 공연장과 노랫말과 달리 다양한 서양악기와 들려오는 리드미컬함, 자유로운 의상과 헤어, 밴드 콘서트 분위기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였다. 리드미컬한 음악에 손은 꿈틀대면서도 눈치 보는 나와 일행의 모습에 혼자 몰래 웃다가도 하늘로 뻗어나가는 듯한 소리꾼의 목소리를 들을 때는 넋이 나간 채로 관람했다.
국악과 밴드의 조화라고 해서 기대하면서도 걱정이 됐다. 이질감이 들거나 적응이 어려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이질감 없이 공연에 스며들었다. 이 공연을 통해 한국 전통악기만 국악에 어울리는 건 아니라는 관점이 생겼다.
키보드와 기타는 청아한 매력을 보여줬고, 드럼과 퍼커션은 심장을 두드리는 것 같아서 웅장함과 벅차오름이 느껴졌다. 베이스와 색소폰은 애절함을 표현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한국 전통음악과 서양악기의 만남은 다채롭고 글로벌한 음악을 탄생시켰다.
뮤지컬, 국악, 밴드 공연을 한 자리에서 한꺼번에 향유해서 좋았다. 심청이가 아니라 오히려 내가 일석삼조였다.
음악에는 장르가 존재한다. 여러 방향으로 뻗어 있는 음악들을 장르라는 카테고리로 분류되기에 우리는 음악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음악 취향을 쉽게 파악할 수 있고, 원하는 장르를 선택하여 자유롭게 들을 수 있다. 그러므로 장르는 기특한 존재이다.
‘심청날다’ 공연을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에 깔린 장르를 지우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음악을 향유해도 좋다는 생각이었다.
이건 국악이야, 클래식이야, 가요야. 라는 생각은 접은 채 음악 그 자체로, 있는 그대로 감상해 보면 어떨까. 이 공연 덕분에 음악을 향유하는 나만의 방법이 하나 더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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