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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ul Jul 07. 2020

#영화 / '82년생 김지영' 주관적인 리뷰.

용기가 나서 이제야 기록하는 '82년생 김지영'을 본 나의 생각.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극과 극의 반응으로 이슈가 됐었다. 나는 소설을 읽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영화가 나왔을 때도 반기는 사람, 반기지 않는 사람들의 반응이 강하게 갈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호기심에 소설을 읽고 싶었지만, 읽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남성우월주의 사상, 여성비하, 남녀불평등과 관련된 모습을 보고 자랐고, 겪기도 했기 때문에 이 소설을 읽으면 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였다. 물론 82년생 김지영과 그녀의 엄마에 비하면 내가 보고, 듣고, 겪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나한테는 별 것 아닌 그런 일들도 힘들었다. 소설을 읽는 것도 피하던 내가 영화가 개봉했을 때 극장에서 바로 보게 된 이유는 용기가 생겨서였다. 소설보다는 덜하다, 문제 될 만한 요소가 많이 줄어들었다, 남자의 입장도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우리의 이야기이다 라는 평들 덕분에 나는 김지영의 이야기를 들여다보기로 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자신의 일을 좋아하고, 꿈을 향해 달려가던 사람이었다. 업무능력도 좋았고, 일에 대한 욕심도 있었다. 앞날이 창창하고 반짝대는 성인 여성이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불이익을 겪으면서도 피하지 않고 맞설 줄도 아는 당당한 여성이었다. 그런 김지영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게 되면서 그 빛이 점점 바래져갔다. 과거 김지영의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서 발견하고, 부러워하는 입장이 되었다. 경력은 단절되고, 다시 기회가 왔지만 그 기회조차 마음 편히 잡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힘들어하는 김지영을 보면서 안타까웠고, 씁쓸했다. 물론 기회를 잡지 못하는 이유가 김지영의 건강상의 문제 때문이기도 했지만, 주변의 시선과 반응, 아이돌보미를 구하는 것도 어려운 현실 등의 이유도 크게 작용해서였다. 동시에 미래의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내 일처럼 억울했고, 가슴 아팠다. 물론 남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한 가정을 책임지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삶도 무척이나 고달프고, 부담이고, 고독할 것이다.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부담과 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고통이었을 거다. 그러나 내가 여성이고. 관련 상처가 있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상대적으로 김지영이 더 안타까워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예쁘게 옷을 입고, 구두를 신고 직장을 다니던 김지영은 여자라 꾸미고 싶었을 텐데도 꾸미는 것은 이미 거리가 멀어진 지 오래고, 커피 한 잔 마시는 것도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하며, 지하철 화장실에서 우는 아이를 달래며 꾸역꾸역 기저귀를 가는 모습, 친구도 편히 만날 수 없는 것, 경력이 단절되는 상황, 어렵게 다가온 기회까지 잡지 못하는 현실까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더욱 가슴 아팠던 것은 김지영의 삶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학벌도 좋고, 직장에서도 인정받을 정도로 업무능력이 출중했고, 쌓아온 경력도 화려했던 여성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누구 엄마, 누구 아내, 그냥 애엄마, 아줌마로 사는 모습을 나타낸 씬을 보면서 공감이 갔다. 열심히 살고, 기를 쓰며 나의 커리어를 쌓아봤자 결혼하면 어차피 다 소용없을 텐데, 밖에서 일 안 하면 무시받고, 일하면 집안일까지 잘해야 욕 안 먹고 인정받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할 텐데 라는 생각으로 내가 하는 것들은 다 부질없게 느껴졌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부터 영화 보는 내내 분노와 슬픔이 차오로는 가슴을 억누르느라 애를 썼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아픈 딸을 신경 써주지도 않고, 아들만 챙기는 그녀의 아버지에게 김지영의 엄마가 대신 폭발하는 씬에서 나도 같이 참았던 것들이 터져 나왔고, 눈물이 흘렀다. 마치 그동안 참기만 하고 순종적이었던 여성들에게 이제는 참지 말고, 내 목소리를 내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김지영의 엄마가 모든 것을 쏟아낼 때, 내가 다 속 시원했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마음을 대변해주고, 대신 쌓아온 감정들을 쏟아 내어 주는 누군가가 있는 김지영이 무척 부러웠다. 하고 싶은 거 다 하라는 엄마의 말에는 내가 응원을 받은 것처럼 힘이 생겼다. 결국에는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김지영을 보면서 내 일처럼 기뻤다.


이 영화의 장점.

남성우월주의, 남녀불평등의 시대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모습을 다양하게 보여줬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82년생 김지영이었지만, 모든 사람들이 주인공이었다.      

마음에 화와 억울함을 품고 살면서도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여기며 살았지만,  그 삶이 딸에게도 되풀이되고, 딸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려고 했던 용기 있는 김지영의 엄마.     

무조건 그 시대의 방식이 옳은 게 아니라는 것을 계속 표현하고, 

다 그런 거라는 식의 반응에 맞서고, 잘못된 부분들을 바로 잡으려는 당찬 김지영의 언니.      

결혼 전 화려했던 자신의 과거를 그저 그런 추억거리로 묻어버리고 

서글프지만 담담한 척 살아가는 김지영의 지인들.     

어릴 때부터 현재까지 그저 그렇게 넘기려고 했던 

상처와 부조리들이 마음에 쌓이고 쌓여 몸도 마음도 병이 된 김지영까지. 


그 시대를 각자 다른 방식으로 꿋꿋이 살아가는 여성들의 모습이 간접적으로든 직접적으로든 잘 표현되었다는 점이 좋았다. 김지영의 엄마가 더 주인공 같다는 평도 있었지만, 내 시선에서는 각각의 캐릭터에 맞게 살아가는 삶을 보여주면서도 주인공의 위치는 침범하지 않게 조화를 잘 이룬 것으로 보였다. 특히 최고의 장점으로 뽑고 싶은 것은 여성의 입장만이 아닌 남자의 입장도 보여줬다는 것이다. 여성들의 입장만큼 크게 다룬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선택은 옳았다고 본다. 남성의 입장까지 크게 다루고 일일이 다 설명하려 했다면 극은 산만했을 것이다. 어찌 됐건 불편하던 불편하지 않던, 이 극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여성의 삶이었다. 주인공도 남녀불평등의 시대의 삶을 산 여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의 주제나 흐름을 깨트리지 않고, 남성의 입장까지 표현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 어려운 것을 무난하게 잘했다고 본다.


출처 - 네이버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주인공으로 한 건 좋은 선택이었을까?

그 시대를 산 여성의 삶을 보여주려고 했다면, 82년생 김지영이 아니라 그녀의 엄마가 주인공이었어야 했다는 평도 있었다. 나도 처음에는 그 부분에 대해서 공감을 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오히려 82년생 김지영을 주인공으로 선택하길 잘했다는 결론이 들었다. 만약 김지영의 엄마를 주인공으로 했다면 그 시대에는 다 그랬다는 식의 반응이 더 컸을 것이고, 그래서 내 이야기처럼 크게 와 닿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82년생 김지영은 현대인들에게 머나먼 세대도 아니고, 그렇다고 너무 가까운 세대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편견이나 당연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김지영의 이야기를 순수하게 바라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우리의 이야기라는 평도 나온 게 아닐까?


출처 - 네이버 영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은 어딘가에 있다.     

그녀의 대사를 보면, 전에는 안 그랬지만 이제야 잘해주고 있다는 상황임을 예측할 수 있다. 

늦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제라도 그녀를 안아주는 남편에게서 나는 미우면서도 고마웠다. 아마 영화 속 김지영의 심정도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진작에 잘하지, 이제야? 왜?’라는 원망이 들어서 노력하려는 남편에게 차가운 반응을 했어도 고마웠을 것이다. 늦게라도 알아준 당신이. 


그래서 김지영은 다시 일을 시작해보려는 시도를 한 게 아니었을까. 현실 속에서도 남성우월주의의 환경 속에서 자란 남자들 중 아내를 몰라주는 무심한 남편이 있는가 하면, 알아주는 남자가 있다. 몰랐더라도 늦게 깨달은 것을 후회하며 그제라도 이해하고, 도움을 주고자 노력하는 남편도 있다. 영화 속 김지영의 남편은 마지막의 경우에 속한 사람이었다. 늦었더라도 개선했고, 성장했다. 



 

영화는 해피엔딩이었다. 

같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예민하고 유별나다는 식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그녀의 곁에는 ‘오죽하면 그럴까’라며 그녀의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사람도 있었다. 

늦게라도 지영의 마음을 알아주고, 도와주는 남편도 있었다. 영화 속 김지영은 오롯이 혼자가 아니었다.

그 덕에 힘든 시기를 잘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무거운 엉덩이는 좀처럼 떼어지지 않았다. 분명히 행복하게 끝났는데, 새드엔딩의 영화를 본 것처럼 가슴이 먹먹했고, 슬프고 아팠다. 괜찮은 척하며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 극장에서 나왔는데 울컥, 감정이 올라왔다. 결국 화장실로 향했다. 문을 잠그고, 그대로 풀썩 주저앉았다. 뭐가 그렇게 슬픈 건지, 울음을 멈추려고 노력해도 쉽사리 멈추지 않았다. 평소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잘 울긴 해도 그 버릇은 이제 많이 좋아졌고, 참을 줄도 알게 됐는데... 왜 이러는 걸까. 이번엔 못 참았다고 하더라도 밖에서, 그것도 일행이 있는 상태에서 이렇게까지 심하게 운 적은 없었는데, 대체 왜 이러는 걸까.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음소리를 밖으로 내지 못했을 뿐, 통곡하는 나를 보며 당황했다. 한참을 울다 깨달았다. '생각보다 많이 힘들었고, 아팠구나.' 그런 생각을 했을 때, 주변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나를 어루만지며, 동시에 같은 화장실에서 숨어 울던 그들을 위로하며 함께 오래 울다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나왔다. 다른 사람들의 말처럼 이 영화는 김지영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우리들의 이야기였고, 우리 어머니들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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