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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ul Nov 02. 2020

말.

박준 작가의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에서의 일부분이다.


그러니 이 말들 역시 그들의 유언이 된 셈이다.

역으로 나는 타인에게 별생각 없이 건넨 말이 내가 그들에게 남긴 유언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같은 말이라도 조금 따뜻하고 예쁘게 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오늘만 하더라도 아침 업무회의 시간에 '전략' '전멸'같이 알고 보면 끔찍한 뜻의 전쟁용어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썼고 점심에는 식당에서 우연히 만난 지인에게 '언제 밥 먹자'라는 진부한 말을 했으며 저녁부터는 혼자 있느라 누군가에게 말을 할 기회가 없었다. 말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났다가 사람의 귀에서 죽는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죽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남는다. 

(중략)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마음에 꽤나 많은 말을 쌓아두고 지낸다. 어떤 말은 두렵고 어떤 말은 반갑고 어떤 말은 여전히 아플 것이며 또 어떤 말은 설렘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검은 글자가 빼곡하게 적힌 유서처럼 그 수많은 유언들을 가득 담고 있을 당신의 마음을 생각하는 밤이다. 


여기서 작가는 말에 대해 여러 관점에서 이야기를 한다. 말이라는 것은 나 자신이나 상대에게 유언이 될 수 있으니 섣불리 뱉어서는 안 된다는 것과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뱉은 말이 상대에겐 큰 상처가 될 수 있으며, 나도 상대의 작은 말에 상처를 받을 수 있다 라는 것, 그리고 단어 선택에서부터 조심해야 된다는 것, 농담으로 던진 말에 예민하게 받아들인다고 누군가가 자신을 비난하더라도 스스로를 탓하지 말아야 할 것. 왜냐하면 누구나 많은 말들은 가슴에 쌓아두고 지내기 때문에. 또 말에 따라 다양한 감정이 뒤따라 온다는 것, 그렇다고 해서 번지르르하게 진심이 존재하지 않는 말만 늘어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 마지막으로 자신이 뱉은 말을 가슴에 담아두고 있는 상대의 마음까지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말은 강한 힘이 있다. 그러나 말만 번지르르하게 자신을 포장하는 도구로 삼는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럴 땐 강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변질된다. 그저 포장지만 되어버린다. 


그래서 말의 강한 힘을 제대로 쓰려면 때에 맞게, 상대에 맞게 적절한 단어와 문장을 써야 하며, 

정말 빈말이 필요할 때만 빈말을 하고, 진심을 담은 어투와 단어, 문장을 구사해야 한다. 


진심과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과 존중이 있다면, 자연스럽게 상대를 아프게 하는 단어나 어투를 쓰지 않게 되며, 조리 있게 말을 하지 않더라도 또는 근사하게 말을 하더라도 어느 쪽이든 말의 강한 힘을 제대로 쓸 수 있다. 만약 말이 행동과 연결되는 것이라면 행동도 말과 일치해야 한다.


즉 진심, 배려, 존중, 언행일치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실천하냐 실천하지 않냐에 따라서 상황의 결과는 달라진다. 


그래서 나는 아래의 사람들을 싫어한다.

아무렇지 않게 말을 내뱉어놓고 사과를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 

말만 해놓고 지키지 못하는 사람(사소한 것이나 가끔이면 괜찮다. 그 정돈 지키지 못할 수도 있는 거니까.), 

또는 실수로 지키지 못했다 하더라도 오히려 뻔뻔하게 화를 내는 사람,

자신을 포장하기 위해 좋은 사람인척, 어른인 척, 그럴듯하게 말을 해놓고 정말 속내는 그렇지 못한 사람,

오해하는 상대는 비난하면서 자신이 오해하거나 말에 상처 받는 거에 대해서는 민감한 사람,

'난 원래 이래, 말을 잘 못하잖아, 그런 뜻으로 말한 거 아닌데 왜 그렇게 생각해? 

나라면 기분 안 나쁠 것 같은데? 네가 너무 예민하고 부정적인거야. 농담을 다큐로 받네' 

이런 말을 서슴없이 하는 사람,

말꼬리 잡고 늘어지거나 따지는 것과 상대가 기분 나쁨을 표시한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

오해가 될까 봐 물어보고, 대화를 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따진다고 하는 사람,

한 두 번도 아니고, 화난다고 분노조절 못해서 최악의 말을 늘어놓는 사람,

그래 놓고 지난 일이라며 흐지부지하게 넘어가려는 사람, 


이 모든 것을 자신은 되면서 상대가 하면 용납 못하는 사람,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장 가까운 가족, 연인에게 당연하게, 서슴없이 하는 사람들을 싫어한다.




갈등이 생겼을 때에도 말에 따라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물론 행동이 일치하냐 일치하지 않느냐에 따라서 또 다른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지만, 

우선 먼저 맞이하게 되는 결과는 말에 따른 결과이다.


하나 예를 들면,


그냥 이 상황을 넘기기 위해, 귀찮아서, 무마하기 위해 그렇게 생각하는 척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예를 들어 그냥 넘기기 위해 미안하다고 대충 사과해놓고 상대방이 사과를 받아주지 않으면 도리어 화를 낸다. "사과했잖아! 도대체 어떻게 사과해야 되는데? 미안하다고 했잖아! 안 받아주면 나더러 어쩌라고!!" 이런 식으로 하거나 "이해한다고 했잖아! 네 말이 다 맞다고! 네 맘 알겠다고!! 알겠다는데 뭐가 문젠데? 도대체 이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데??" 이런 식으로. 


그럼 상대는 상대대로 상처 받고, 답이 없다고 느끼며 떠나거나 그냥 내가 참고 살아야지 생각하며 껍데기로만 있게 된다. 특히 남들은 남에게 생각보다 관심이 없으므로 감정 소모를 하면서까지 그런 사람에게 알아듣게 설명하고, 조언하지 않는다. 깨닫고 바뀔 때까지 기다려주지도 않는다. 그저 '넌 너니까 이해해'라는 좋은 말로 포장한다. 그렇게 관계는 계속 이어질 수도 있다.


그럼, 그 사람은 그래, 결국엔 내가 맞잖아. 나랑 너랑 다르니까 이해해야지, 다들 나 이해해주면서도 옆에 있잖아? 뭐가 문제인데?라고 하며 또 다른 사람에게 앞에서 적은 행동과 말을 되풀이한다. 결국 악순환이다. 


떠난 사람들에게는 내 그런 모습을 보고도 남아있는 사람들도 있는데 떠난 너희들이 잘못된 거야, 풀려고 했는데 사과했는데 뭐라 한다, 나 같은 사람도 있어! 나 이런 성격인 거 몰라? 나 원래 이래! 라면서 답답해한다. 심지어 나 같은 사람도 있는 거야, 너 같은 사람만 있는 거 아니야 라면서 이해 못해주는 사람을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러면서 그런 사람들한테 져줘야 하냐며 본인 나름대로 힘들어한다. 그렇다면, 그럼 그들은 상대에게 너 같은 사람만 있는 거 아니라면서 상대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 때, 반대로 자신도 자신 같은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을까. 자신도 이상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을까. 대게 이런 사람들은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경우가 많다. 더 나아가 그런 사람들은 자신을 받아주고, 우쭈쭈 해주는 사람들이나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하고만 어울리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다 거기서 거기이기 때문에 시야가 좁고, 더 성장하지 못한 채 나이만 먹게 된다. (이런 것이 진정한 꼰대가 아닐까.)


반대로 우선은 자신이 뭘 잘 못했는지 모르고, 상대의 기분에 공감은 못하지만 상대를 이해하고 싶고, 내가 뭔가를 잘못은 했구나라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들었으며, 무엇보다 상대와 잘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사과를 하거나 상대를 달래줄 수 있는 말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앞의 경우와 완전히 다르다. 앞의 경우는 그저 무마하려고, 귀찮아서, 이 상황이 싫어서 벗어나고 싶으니까 대충 그런 척하는 것이지만, 이 경우에는 잘은 모르더라도 상대를 향한 마음과 배려, 존중으로 사과를 하거나 네 맘 이해해, 네 맘 잘 알아라고 말한다. 이 경우에는 상대방도 그런 마음을 눈치채게 되고, 일단은 그것을 받아준다. 나중에 어떤 잘못을 했는지 묻거나 설명을 하거나 서로 대화를 하더라도 일단 그의 마음을 받아준다.


이렇게 갈등에 부딪혔을 때 처음으로 나오는 것은 말이기 때문에 그만큼 중요하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 라는 말이 있듯이 단어 하나에, 어투 하나에, 진심 유무에 따른 문장 하나에 

갈등에 부딪힌 상황이 아니더라도 일상 속에서 서로 상처를 주고, 받는다. 

서로 오해도 하고, 풀어가고, 갈등이 생기고, 또 풀어간다.


그래서 더 큰 오해가 쌓이기 전에 물어보는 것이며, 갈등이 더 커지기 전에 부딪히며 대화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툼도 정말 말꼬리만 잡고 붙들고 그러지 않는 이상, 하나의 대화가 된다.

그것을 아는 사람들은 더 이상 피하지 않으며,

화를 스스로 다스리면서, 정말 최악의 말은 하지 않고 스스로 필터링을 하면서

상대와 다툼을 하고, 대화를 하고, 오해를 풀고, 갈등을 풀어간다.


나도 그러려고 노력한다. 무엇보다 말에 상처를 많이 받기도 했고, 반대로 별 거 아닌 말에 위로를 받고, 기대를 하고, 마음이 약해지기도 했으므로 말의 힘과 그리고 말이 행동과 일치했을 때 관계가 변하고, 상황이 변하고, 시간이 좀 걸리든, 빠르든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 뼈저리게 배웠기 때문이다.


특히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말로만 하는 사람들, 근사한 말들과 어투로 자신을 그럴듯하게 좋은 사람으로 포장하는 그들에게 수도 없이 속아왔다. 나름 눈치 빠르고, 직관력이 있다는 말들을 많이 들었음에도 항상 나는 말 한마디에 마음이 약해져서 알면서도 속았다. 한 마디로 헛똑똑이였다. 한 때는 그런 경험을 겪어서 힘들었지만, 그 경험이 결국엔 좋은 자양분이 되었다. 그런 경험들이 없었다면 나는 벌써 말로 먹고사는 사람들에게 사기를 여러 번 당했거나 상처 받고 또 기대하고, 믿고, 다시 실망하고, 상처 받기를 반복하면서 사람들을 극도로 혐오하게 됐을 것이다. (그러나 가족에게는 아직도 속을 때가 종종 있다.^^)




나도 상대방도 사람이기 때문에 실수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자존심에 실수에 대한 제대로 된 사과도 없고,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인정하지 않고,

계속 반복한다면 그것은 실수가 아니라 단점이 되는 것이다. 고칠 필요성이 있는 단점.


그렇다고 해서 상대방은 나에게 막말을 퍼붓는데도 

난 그런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바보같이 다 듣고만 있어서도 안 된다.

그렇다고 똑같이 해서도 안 된다. 

가능한 똑같은 사람이 되지 않는 선에서, 기본을 지켜가며 할 말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사람이 아닌 진짜 그런 사람이 되도록, 

화가 났다고 해서 먼저 기본을 벗어난 말을 하지 않도록, 

화났는데 무슨 말을 못 할까 라는 핑계로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오해를 할 것 같으면 먼저 물어보도록,

내가 아무리 나쁜 의도로 말하지 않았더라도 상대방이 기분 나쁨을 알렸다면, 그 마음을 이해하고,

오해하게 해서 미안하다며 사과를 하고, 나의 진심을 이야기할 수 있도록, 

무마시키기 위해, 넘어가기 위해 성의 없이 네 맘 안다는 말이나 사과를 하지 않도록,

바보가 되지 않도록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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